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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한양은 동북아의 핵심 외교 무대이자 국제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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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배 계층은 한반도가 동북아의 지리적 허브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이 곧 위기이자 기회라는 역설도 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웃 여러 나라와의 외교와 선린 혹은 대결과 경쟁에 대비해야 했으며, 이를 위한 제도와 문물을 갖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선은 매우 치밀하고도 정교한 외교 관련 문물제도를 갖추고, 그 지리적 무대로 서울은 동북아의 핵심 외교 무대이자 국제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전 세계 192개국 가운데 189개국에 이르지만, 조선 시대에는 동북아시아의 몇몇 나라와만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는 조선 전기와 후기가 조금 다른데, 우선 조선 전기에는 중국과 일본을 필두로 만주 지역의 여진족과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만주 지역에서 청나라가 흥기하면서 여진족이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고, 자연스럽게 조선의 외교 상대에서도 제외되었다.


이 밖에 미얀마를 비롯한 몇몇 남방 국가와도 왕래가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과의 외교적 긴밀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처럼 조선이 이웃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서울은 그야말로 동북아 지역 외교의 핵심 무대가 되었다. 특히 조선의 국왕이 바뀌는 등 큰 변화가 생길 때면 각국 사신이 일시에 서울로 몰려들어 활발한 외교전을 벌이곤 했다.


이렇게 몰려드는 각국 외교 사절을 위해 서울에는 외교 공관이 생겼는데, 어느 나라에서 온 사신인가에 따라 이들이 머무는 공관이 각기 달랐다. 먼저 중국 사신의 경우 태평관(太平館)과 모화관(慕華館)에 머물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일본·유구·버마 등 남방 국가에서 온 사신은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고, 만주 지역에서 온 여진족 등은 북평관(北平館)에 머물렀다. 조선 전기 명나라 사신이 주로 묵던 태평관은 지금의 중구 삼성생명 빌딩 뒤쪽 국민은행 서소문지점 자리에 있었고, 모화관은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다. 그리고 일본 등의 사신이 묵던 동평관은 중구 인현동2가 192번지에 있었으며, 여진족 사신이 묵던 북평관은 종로구 종로6가 동대문 옆 낙산 자락에 있었다.


조선 후기 일본 사신은 서울에서 쫓겨나 부산에서만 업무 수행
일본의 대조선 외교는 대부분 대마도 도주(島主)들이 주도했다. 대마도는 일본과 조선 사이에 있는 섬으로, 환경이 매우 척박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한 물품을 외부(일본과 조선)에서 조달해야만 했다. 조달 방법은 통상과 노략질에 의존했다. 거리로 따지면 일본보다는 조선이 더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한반도의 해안 지방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에 극심하게 시달렸고, 대마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조선의 대일본 외교 전략의 핵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세종 때는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를 정벌한 후 대마도 도주에게 조선의 벼슬을 내리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통상을 허락해 노략질 대신 무역을 통해 물품을 조달하도록 허락했다. 통상이 공식적으로 허락된 조선 전기의 경우 일본 사신은 대마도 도주를 앞세워 서울까지 직접 올라와 왕을 알현했다. 하지만 이런 직접 외교와 통상 관계는 임진왜란 이후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 사신은 서울까지 직접 올라올수 없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신이 왕래하던 길을 따라 침략했기 때문이다.


사신 행차 길이 침략의 루트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신은 부산에 마련한 왜관(倭館)을 통해서만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 ‘조선통신사 행렬도’. 가마를 탄 조선의 정사를 일본인들이 수행하는 모습을 그렸다. / <봉사조선창화시권>.
명나라 사신과 조선의 집현전 학사들이 주고받은 시문을 모아 만든 책(국립박물관 소장)


나라마다 드나드는 도성 문도 달라
외국의 사신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후 일정한 의식에 따라 접대를 받으면서 서울로 향했다. 명나라 사신은 의주로를 따라 육로로 서울까지 와서 한양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통해 도성 으로 들어왔다. 반면 일본 사신은 부산에서 육로로 충주까지 와서 한강의 수로를 이용해 배를 타고 서울 동호에 도착한 후 광희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여진족은 관북로를 이용해 혜화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어느 국가의 사신이냐에 따라 묵는 장소만 다른 것이 아니라, 통행로와 드나드는 도성 문까지 달랐던 것이다.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이고, 광희문과 혜화문은 도성에서도 작은 문이었다. 특히 광희문은 도성에서 죽은 시체가 나간다는 문으로 시구문(屍口門)이라 불렀다.


각국 사신을 접대하는 조선 조정의 예우 역시 국가별로 달랐다. 예를 들어 중국 사신을 위한 공식 연회는 7회인 데 비해 일본이나 여진의 사신을 위한 공식 연회는 5회인 식이었다. 연회를 베푸는 주관자도 달라서 중국 사신은 국왕이나 왕세자 또는 정승 반열이 직접 접대했다. 말하자면 국빈급 예우다. 일본 등은 그보다 한두 단계 낮아 오늘날 장관급에 해당하는 예조판서가 접대를 주관했다. 이런 차별을 둔 것은 중국의 위력을 의식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동북아의 최강자인 중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이유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정치와 통상을 한 번에 해결
사신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본국에서 부여한 외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중국 사신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격식에 맞추어 황제의 칙서를 무사히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으며, 부수적으로 조선의 내정(內政)을 탐문해 보고하는 것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더불어 자국 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무역 관련 일도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국가원수가 외국에 나갈 때 많은 기업인이 함께 출국해 경제 외교를 펼치듯 조선 시대에도 각국 사신이 서울에 올 때는 상인들과 동행했다. 이들은 많은 상품을 가지고 들어와 조선 상인들과 거래했으며, 사신이 머무는 공관을 물품 거래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의 외교 담당 관료는 이런 거래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돕는 역할도 수행했다. 예컨대 1480년(성종 11년)에는 정부에서 중국과 조선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거래 물목(物目)을 적어서 태평관에 방을 붙이기도 했다. 이때 거래된 상품은 삼베·명주·여우 가죽·담비 가죽·원숭이 가죽·후추·꿀·청동 그릇·칼·인삼 등이었는데, 가장 인기를 끈 상품은 단연 인삼이었다.


반면 대규모 상품 거래를 허용하지 않은 일본과 여진의 상인들은 동평관과 북평관에서 종종 밀무역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이들 사신의 관소 밖 출입을 통제하고 철저히 감시하는 등 중국 사신과는 사뭇 다르게 대했다. 일본 사신이 조선에 요구한 물건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대장경이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의 대장경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다. 그다음으로는 성리학 관련 서적이 인기를 끌었다.


▲ 중국 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던 망원정


최고의 접대는 한강 유람선 승선
사신은 정치·경제적 목적 외에도 조선의 내정을 탐색하는 일, 조선의 인재를 만나는 일, 조선의 각종 제도와 문물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일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중국 사신은 종종 서울 인근을 유람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과 만나 시문(詩文)을 주고받으며 정보를 수집하고, 개인적인 외교 인맥도 만들어갔다. 명나라 사신이 서울 지역을 유람할 때는 미리 태평관의 관리인 관반(館伴)을 통해 조선 측에 행선지를 통지하는 것이 관례였다. 통지를 받은 조선 조정은 사신이 갈 곳에 먼저 관리를 파견해 연회 개최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또 자주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사신이 지방으로 나갈 경우 해당 지역에 관리와 공문을 보내 외교적 문제의 소지가 있는 국내의 행정 문서를 노출하지 말 것과 누정의 현판이나 시문 등도 모두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심지어 민가 담벼락에 붙어 있는 종이도 글씨가 없는 것으로 교체하도록 했는데, 이는 해당 문구로 인해 양국 사이에 발생할 외교적 분쟁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서 가장 가보고 싶어 한 곳은 한강이었다. 그만큼 당시의 한강은 절경을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용산구 한남동의 제천정, 천주교 성지인 합정동의 잠두봉, 한강 하류의 망원정이 인기가 높았다. 특히 용산의 제천정에서 마포의 망원정까지 물줄기를 따라 유람할 때는 왕 전용 유람선인 정자선(亭子船)을 이용했다. 배에 누각을 올려 만든 정자선은 길이가 32m에 달하며, 60여 명 이상이 타고 연회를 열 수 있었다. 금으로 새겨 넣은 ‘부금(浮金)’이란 현판까지 걸린 화려한 배다.


이 배를 타고 한강에서 유람할 때는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조선의 왕에게 바치기도 하고, 선상에서 조선 관리들과 한강의 경치를 주제로 시문을 나누기도 했다. 조선 관리들과 지속적으로 시문을 교환한 이유는 조선 정부에 어떠한 인재가 있는지 파악하기 위한 시도였다. 또 한강 변 정자에 앉아 활쏘기와 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감상하면서 조선의 군사와 무예 수준을 파악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예우는 중국 사신에게만 국한된 것이었고, 일본이나 여진족 사신에게는 자유로운 유람이 금지되었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서울은 동북아시아 외교 무대의 중심이자, 각국 사신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국제도시로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 변모의 과정이 곧 우리나라의 역사이자 우리 외교사의 한 부분이다.

* 4월호에는 600년간 이어져온 조선의 왕실 문화를 소개합니다. 조선의 왕궁은 모두 한양에 있었으며, 왕실과 관련한 인물도 대부분 종로구에 모여 살았습니다. 왕실 사람들이 누린 문화는 하늘이 내린 솜씨를 지닌 장인들이 이룬 당대 최고 수준의 문화였습니다. 조선 왕궁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문화 속에 살았는지 살펴봅니다.





글 이상배(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서울 역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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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한양은 동북아의 핵심 외교 무대이자 국제도시였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632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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