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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영의정보다 한성 판윤 되기가 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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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창건한 이성계는 고려의 영향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궁궐을 완공하기도 전에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 그리고 한양부를 한성부라 개칭하고 성석린을 판한성부사에 임명했다. 조선 왕조 초대 서울시장인 셈이다. 조선왕조에서 한성부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막중했기에 한성 판윤의 권력도 막대했다. 그런 자리인 만큼 인선에 신중을 기했는데, 왕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로 외가 쪽 3대까지 지체를 살폈으며,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는 집안의 인물만 기용했다고 한다. 역사 타임머신을 타고 600년 전 한양으로 들어가보자.




▲ 이성계 영정.고려 말 장군으로 조선
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2년부터
1398년까지 재위했다.


1392년 7월 17일,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 공양왕에게 선위(禪位)받는 형식으로 즉위했다. 그는 하루빨리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원했다. 새 나라를 세움으로써 도읍도 새롭게 정해야 한다는 점, 개경의 지덕(地德)이 이미 쇠하여 조선의 도읍지로 마땅하지 않다는 점, 우왕과 창왕을 폐출하고 명망 높은 중신인 최영과 정몽주 등을 살해한 개경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태조의 심리 등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는 수도로 적합한 여러 지역을 조사하고 현지를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결정한 곳이 지금의 서울이다. 한양은 나라의 중심에 위치해 전국을 통솔하기에 유리하며, 삼각산과 한강을 끼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강물을 이용한 수륙 교통이 발달해 국가 재정의 중심인 조세를 거두기에 편리했다. 또 한양을 둘러싼 지세가 적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군사적 요새인 데다 옛 백제의 500년 도읍지였다는 점 등이 고려의 수도 개경보다 도읍지로서 매력을 한결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수도를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신하마다 다른 주장을 하면서 의견 대립을 보여 무려 2년간 토론을 계속했다. 최종적으로 태조는 1394년 새로운 도읍지를 한양으로 확정하고, 9월 1일 수도에 궁궐을 짓기 위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했다. 이는 수도가 갖추어야 할 궁궐·종묘·사직 위치, 관아 건물의 배치, 도성 건축, 도로 건설, 주민이 살 공간 확보 등 도시계획을 위한 기구다. 하지만 태조는 한양의 도시 시설이 갖추어지기도 전에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 일반적으로는 궁궐 건물을 짓고 수도의 면모를 갖춘 이후에 왕이 옮겨가는 것이 상식이다. 그는 같은 해 10월 25일 개경의 각 관청에 관원 두 사람씩만 남기고 한양 천도를 단행해 10월 28일 서울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리는 태조 이성계가 얼마나 빨리 수도를 옮기고 싶어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태조는 먼저 종묘와 사직단 터를 살피고,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했다. 12월 3일에는 궁궐 공사의 기공식을 진행했다. 이어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새 도읍 건설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산신(山神)과 수신(水神)에게도 종묘·궁궐의 축조, 민생과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한양에서 개경으로, 다시 한양으로
1395년 6월 6일 태조는 한양부를 한성부라 개칭하고 같은 달 13일에는 성석린(成石璘)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임명하니 조선 왕조 초대 서울시장인 셈이다. 이어 궁궐과 종묘·사직단이 천도 후 1년 만인 1395년 9월 29일에 준공되었으며, 같은 해 윤 9월 13일에는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한양 도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5일 종묘에 나아가 태조 이성계의 4대조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12월 28일 경복궁 궁궐로 들어갔다. 태조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후 1년여가 지나서야 비로소 궁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새 도읍지에 필요한 나머지 시설을 단계적으로 건설하면서 수도의 위상을 갖추어나갔다.


그러나 1398년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의 둘째 아들 정종(定宗)이 왕위에 오른 후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하지만 정종은 1400년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동생 이방원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의 뒤를 이은 태종 이방원은 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했다. 태종은 한양으로 환도하기 전에 창덕궁을 짓도록 한 뒤 몸소 현장에서 건설공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5년 10월 8일에 개경을 떠나 11일 한성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주일 후 창덕궁이 낙성되어 10월 20일에 궁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경복궁과 창덕궁을 갖추고 한성을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조선 왕조 500년 역사가 시작되었다.


▲ 조선 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에는 한성부의 업무가 구체적으로 기록
되어 있다


‘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철학을 담은 행정구역 이름
한성부는 조선의 수도이자 도성 안팎을 관할하는 행정 관아로, 오늘날 서울특별시청과 같다. 한성부의 직제는 기본적으로 고려 시대 개성부 직제를 바탕으로 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적·물적 규모가 확대되면서 그 틀이 잡혀갔다.
한성부의 관할구역은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이었다. 즉 북악·인왕산·남산·낙산을 연결하는 약 18km의 도성 내부 지역과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약 4km)에 이르는 영역을 관할했다. 성저십리라 하면 동쪽으로는 중랑천, 서쪽으로는 양화나루와 불광천,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러한 관할구역은 1895년 갑오개혁 때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가 25개 구로 나뉘어 행정을 담당하듯 한성부도 관할구역을 다스리기 위해 전체를 방향에 따라 중부, 동부, 서부, 북부, 남부 등 5개 부(部)로 나누었다. 그리고 부 밑에는 52개 방(坊)을 두어 행정의 효율을 꾀했다. 이들 행정구역의 이름을 지을 때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유교 덕목과 실천 내용을 담은 단어, 국가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말, 인간 교화와 선행을 담은 용어 등을 사용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성리학의 정치 철학을 담은 것이다.


조선 시대 한성부의 최고 책임자는 한성부 판윤(判尹)이다. 처음에는 판부사(判府事)·판사(判事)로 불리다가 판윤으로 굳어졌는데,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이다.


그리고 판윤 아래에는 좌윤(左尹)과 우윤(右尹)이 1명씩 있어 판윤을 보좌했는데, 이들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부시장에 해당하는 직급이다. 그리고 직접적인 행정실무는 서리(胥吏)와 아전이 담당했고, 잡역에 종사하는 도예(徒隷)가 있었다.


한성부의 판윤과 좌윤·우윤은 조정의 중요 회의에 참여해 국정을 논의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다. 특히 한성 판윤은 중앙 관직을 가지면서 어전회의에 참석해 3정승 6판서와 함께 국정을 논의하며 국가의 주요 행사에 참여하는 등 중앙관직의 재상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다. 지금의 서울시장도 국무회의에 참석할수 있다.


막강 파워지만 단 하루 만에 물러나기도
그러면 지금의 서울시장과 조선 시대 판윤 가운데 누가 더 권력이 막강했을까?


물론 조선 시대 판윤이다. 당시 한성 판윤은 지금의 서울시장에게 없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한성부 판윤과 좌윤·우윤은 한성부 업무 외에도 조정을 대표하는 외교 사절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으며, 중국 사신을 영접하고 영송하는 외교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 외 지방의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왕이 행차할때면 앞장서서 어가를 안내하기도 했다. 보다 큰 권한은 한성부에서 죄인을 잡아 문초하고 형벌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은 입법·사법·행정 등 삼권이 분립되어 서로 견제하는 체제지만, 조선 시대에는 중앙집권 체제였기에 한성 판윤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조선 왕조에서 한성부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의정 하기보다 한성 판윤 내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성 판윤은 낙점받기 힘든 자리였다. 판윤을 임명할 때는 왕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로 외가 쪽 3대까지 지체를 살폈으며,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는 집안의 인물만 기용했기 때문이다.
초대 판한성부사 성석린 이후 오늘날까지 수도 서울을 관장한 한성 판윤은 약 1450명에 달하며, 평균 재임 기간은 5개월 정도다. 판윤을 가장 오래 지낸 사람은 광해군 때 13년 4개월을 역임한 오억령(吳億齡)이며, 단 하루를 지낸 판윤도 5명이나 있다.


▲ 19세기 한성부 청사 모습과 관리들
모습. 오른쪽 맨 끝에는 서양인이 서 있
으며, 직책에 따라 옷차림이 다른 모습
을 볼 수 있다.


300일 근무하고 60일 쉰 한성부 공무원
한성부의 공무원은 어떻게 근무했을까? 한성부 관리는 다른 중앙 관직의 관리처럼 연간 약 300일 근무하고 60일가량은 쉬었다. <경국대전(經國大展)>에 따르면 한성부 고위 관리가 조정에서 열리는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날은 한 달에 4회 정도였다. 휴일은 정기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대체로 매달 1, 8, 15, 23일과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등 철을 가르는 날이었다. 또 왕과 왕비의 생일이나 장례식이 있는 날도 공식 휴일이었지만, 그런 날은 오히려 의례 준비로 더 바쁘게 보냈다. 개별적으로는 부모상을 당하면 멀고 가까운 거리에 따라 일수에 차등을 두어 휴가를 받았다. 오늘날 공직자가 주 5일 근무제에 따라 1년에 평균 120일 정도 쉬는 것과 비교해보면 절반인 셈이다.


조선 시대 한성부에서 한 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업무는 호적을 관리하는 일이다. 전국의 호구와 인구수를 조사하고, 이를 정리해 보관하는 업무가 가장 큰 일이었다. 이 기록에 근거해 세금은 물론 군대 징집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라를 운영하는 데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업무였다.
이 외에도 이방은 인사 관계 업무로 관리의 근무평정과 송사를 담당했다. 호방은 호적 업무와 한성부 내의 세금 부과, 토지, 가옥, 시전 업무를 담당했다. 예방은 간택(揀擇)과 산송(山訟), 의례, 왕과 왕세자의 행차 경비, 결혼 적령기의 혼례 후원, 효자와 열녀 추천 등을 맡았다. 병방은 서울 사람에게 시간을 알리는 일과 화재 예방 업무, 봄가을 궁궐과 도성 순찰, 한강 뱃사공 관리 등을 맡았다. 형방은 살인 사건의 원인을 밝히고 시체 검안서를 쓰는 일, 서울 사람의 안전 관리, 임금이 거둥할 때 도로 정리와 경비, 죄수 점검, 3년마다 노비안 작성 등을 담당했다. 공방은 주민의 노동력 동원과 한성부 내 시설물에 대한 점검과 청소, 한강을 건너는 배의 관리 감독, 남산·인왕산 등 도성 주변 산의 송충이 잡이와 소나무 벌채 단속 등을 맡아보았다. 전체적으로 한성부 사람들의 삶 전체를 관리하고 점검하며 국가의 주요 업무도 상당수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3월호에는 국제 도시로서의 서울을 소개합니다. 조선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각국의 사신들이 서울에 와서 머무르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각국의 외교 공관은 어디에 있었고 사신에 대한 예우는 어떠했는지 알아봅니다.





글 이상배(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서울역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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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617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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