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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도시] 집 밖은 정원, 그 정원의 미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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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중년의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 학생들에게 30년 뒤에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라고 하셨다. 꿈 많은 소녀와 소년들은 한순간에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되었다. 남들이 하는 건 다 따라 해야 잘 사는 인생이라고 배우던 시절이었으므로 나는 선생님이 나눠주신 갱지에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아이들을 그려 넣고, 마당이 있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오손도손 살고 있을 거라고 썼다.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30년이 지났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육아 터널의 끝에서 뒤를 돌아보니 시간은 미싱처럼 잘도 돌아갔다. 내 곁에는 얼굴을 아는 남편과 세 아이가 복작대고, 꿈에도 나오지 않았던 고양이까지 어슬렁거린다. 마당이 있는 집은? 개뿔도 없다. 단독주택은 부모의 재물운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람이나 누릴 수 있는 주거 형태라는 사실은 ‘물은 1기압에서 100℃에 끓는다’라는 사실만큼 견고하다. 서울을 벗어날 자신이 없고, 서울이 익숙하고, 서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귀촌은 아직 먼 이야기다. 게다가 나에게는 식물을 키우는 재주가 없다. 분명히 식물을 좋아하는데, 집에 들인 화분은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이쯤 되면 내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해야 한다. 살해를 멈추라는 식물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받아들인 뒤로 집 밖의 초록 생명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키우는 식물이나 스스로 자라는 식물을 관찰하는 순간부터 집 밖은 정원이 된다. 각박하고 삭막한 도시 생활에 찌들지 않기 위해 나는 종종 집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마추어 식물 애호가로서 누리는 즐거움을 널리 알리려고 <집 밖은 정원>을 펴냈는데, 책의 부제목처럼 식물을 관찰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튼튼해진다. 식물의 말 없는 성실함에 천천히 물들기 때문일까? 시간이 얼마 없을 때는 한가로이 종로구 혜화동 골목을 순회하지만, 여유가 좀 더 있으면 성균관에 들러 ‘은행멍’을 때린다. 아무리 바빠도 3월의 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에는 창경궁에 들러 옥천교 주변에 피는 매화를 감상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궁궐에 들르면 철마다 변화하는 식물을 무료로 마중할 수 있다.

집에서 15분쯤 걸으면 내가 다니는 교회에 닿는다. 건물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면 옥상정원이 나온다. 100평쯤 되는 정원 가운데에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그 주위에는 다양한 나무와 풀이 빙 두르고 있다. 테이블과 의자, 그늘막이 쳐진 스윙 벤치도 있어서 세상살이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풀어놓기에 적당하다.

이 정원에는 확실한 존재감을 뽐내는 앵두나무가 있다. 4월 첫째 주가 되면 가지마다 빼곡하게 꽃송이가 들어차서 보는 이를 황홀하게 한다. 하지만 꽃만 무성하고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 벌이 없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걸까? 대로변 건물의 옥상에서 자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사람도 비혼이 대세인 대한민국에서 꽃나무도 결실을 맺지 못한다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그때 머릿속에서 작은 이파리가 살랑거렸다. “얘가 꽃이 피면 벌을 엄청 많이 불러온다니까.” 창덕궁 옆에 살면서 옥상 텃밭을 가꾸는 사진작가 R 선생님(이라고 쓰고 엄마 친구라서 아줌마라고 읽는다)의 말씀이 떠올랐다. “얘가 누군데요?” R 선생님은 달걀처럼 둥글고 끝이 뾰족하면서 주변에 톱니무늬가 둘러 있는 이파리를 하나 뜯어주셨다. 코끝에 이파리를 갖다 대니 익숙하면서도 강력한 향이 콧구멍을 통과해 편도체를 거쳐 대뇌피질에 안착했다. “방아야.” 설마 추어탕에 넣는 그 방아인가? 맞았다. 정식 명칭은 배초향(排草香)이다. 한자 이름처럼 다른 풀의 향기를 밀쳐낼 정도로 힘찬 향기를 자랑한다. 벌이 방아에 오픈 런을 하듯 몰려드는 원리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방아가 옥상 정원의 앵두나무를 구원할 거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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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선생님께 방아 모종 두 뿌리를 받았다. 2021년 4월 4일 옥상정원에 뿌리를 내린 방아는 한 달 사이 두 배로 성장했다. 어리고 작고 약한 것들을 수호하는 일로 분주한 K 신부님이 방아를 맡았으므로 마음을 푹 놓았다. 방아는 그해 8월 보랏빛 꽃차례를 올렸다. 앵두꽃은 봄에 피므로 방아를 이용해 앵두 열매를 맺게 하겠다는 어설픈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옥상정원에서 방아 잎차를 마시면서 내년에 방아전을 부쳐 먹을 계획을 세웠다.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왔다. 이듬해인 2022년 4월, 방아 모종이 옥상정원에 뿌리를 내린 지 1년이 되었다. K 신부님이 새로 난 방아의 다섯 줄기를 발견했다. 방아야, 방아야, 무럭무럭 자라라.

“큰일났어요!” K 신부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일인데요?” “누가 방아를 캐어 갔어요!” 아니, 방아가 장발장의 은촛대라도 된단 말인가? 교회 옥상정원에서 방아를 캐어 간, 간이 부은 죄인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서 CCTV를 돌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진실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영혼의 평화이니 범인을 추적하지 않고 사건을 덮기로 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났을 때 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얼른 옥상으로 올라와보세요!” 방아가 뽑힌 자리에 새끼손톱보다 작은 동그란 잎들이 돋아나 있었다. “이게 뭔데요?” “작년에 방아가 맺은 씨앗들이 발아했나 봐요!” 한 알의 밀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더니 장발장이 뽑아간 방아는 시커먼 탐심을 증발시키고 백배의 방아 새싹을 남겼다.

이듬해 K 신부님은 서울 정동 대성당으로 발령이 났고, 나는 방아 씨앗보다 작은 암세포에 눌려 정신을 못 차렸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방아는 K 신부님을 따라갔다. 대성당의 사제관 안마당에 자리를 잡은 방아는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견뎠다. 엊그제 대성당에 들러 무럭무럭 자란 방아를 만났다. 잘 있었지? 나도 잘 있었어. 한 치 앞을 모르고 살다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는 게 생명체의 운명이라지만, 그날이 닥치기 전까지는 너의 초록빛 응원을 받으며 용감하게 한 걸음씩 옮겨볼게. 너도, 나도 찬란한 봄에 기지개를 쭉 켜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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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덕
서울에서 나고 자라 고려대학교에서 국어교육학을 공부했다.
대안 학교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아무튼, 목욕탕>, <열다섯은 안녕한가요>와
마음이 튼튼해지는 서울식물 산책에 관한 책 <집 밖은 정원>을 썼다.

글ㆍ사진 정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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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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