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에서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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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서울시 홍보대사 배우 최불암

서울사랑

“안녕들 하세요? 내가 여기 주인이우.” 삼삼오오 둘레길을 걷던 이들이 배우 최불암을 알아보고 반색을 하자, 그가 이렇게 인사했다. 어리둥절하던 사람들도 이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최불암은 불암산(佛巖山) 이름과 같은 한자를 쓴다는 인연 때문에 지난 2009년 노원구로부터 명예 산주(山主)에 임명되었다. 그는 해마다 불암산보존회와 함께 산신제를 지내며 산과 산자락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행사 때는 인파에 휩쓸려 걷느라 주변 풍경을 하나도 못 봐요. 그런데 오늘은 참 좋네!”

최불암 씨는 정암사에서 학도암까지 서울둘레길을 1시간30분 남짓 걷는 내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화답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어린아이에게는 먼저 다가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너희들이 건강하게 자라라고 산에 이런 길을 만든 거란다. 산이 자연이고, 자연이 바로 너희들 자신이야.”
길을 걷다 발밑에 돌부리처럼 박혀 있는 나뭇가지를 보자 일행 중 힘을 쓸 만한 사람을 찾아 제거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바닥에 단단하게 박혀 있던 나뭇가지가 치워지는 것을 본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인사했다. “오늘 참 좋은 일 하셨네. 저거 때문에 십중팔구 누군가는 넘어졌을 거예요.”
마치 숲 속 오솔길이라는 작은 무대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그런 것이라고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가시밭길 걸으며 뒤따르는 자식은 조금이라도 편하기를 바라면서 먼저 길을 다져온 사람들이 있다고, 그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일흔 중반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외모와 가벼운 걸음걸이 때문에 둘레길에서 그를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놀랐다.”

서른한 살부터 &;수사반장; 박 반장으로 18년, 마흔 살부터는 &;전원일기; 김 회장으로 22년을 살아온 그였다. 일찍부터 노역을 많이 맡아 온 덕에 제 나이에 이르러 오히려 젊어보이는 걸까. 흑백 브라운관 앞에서 가슴 졸이던 아이들은 이미 박 반장보다 늙어 은퇴를 준비할 나이가 되었고, 양촌리를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던 노인들은 세상을 떠나기도 할 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배우 최불암만은 저마다의 추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국민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그에게 많은 것을 투사해온 사람들은 최불암이란 노배우의 건재함에서 위안을 얻는다.
“이름이 너무 커서 어머니도 한번 불러보지 못한 채 / 내가 광대의 길을 들어서서 염치없이 사용한 / 죄스러움의 세월,영욕의 세월 / 그 웅장함과 은둔을 감히 모른 채 / 그 그늘에 몸을 붙여 살아왔습니다. …(중략)…터무니없이 불암산을 빌려 살았습니다. / 용서하십시오.”

“그가 자신의 자작시로 세운 불암산 시비 앞에서 시를 낭송하자, 주위를 빙 둘러선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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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 씨는 명예 산주를 맡아달라는 구청의 제안을 덥석 수락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먼저 그의 애송시로 시비를 세우겠다는 뜻만 받아들여 불암산공원에 윤동주의 ‘자화상’을 새겨 놓았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는 사내처럼 산을 찾는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기왕이면 최불암의 자작시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는, 만일 시가 완성되면 그때 명예 산주도 수락한다고 했다. ‘불암산이여’라는 시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는데, 한 글자도 누구의 도움없이 꼬박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가 아니라 사과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본명은 최영한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미 곁에 남은 어린 영한이 무탈하게 자라길 기도하며 받아온 새 이름이 불암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차마 부를 수 없는 큰 이름이라며 간직만 하고 있었는데, 그가 배우로 데뷔하면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어머니는 시인 박인환이 ‘세월이 가면’을 즉석에서 지어낸 곳으로도 유명한, 과거 문화예술인들의 단골집 명동 ‘은성주점’의 주인이었다. 한번도 “불암아!” 하고 아들을 부르지 못했던 어머니가 온 나라 아이들까지 읊어대던 ‘최불암 시리즈’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주 좋아하셨겠지. 어머니는 예술을 사랑하고 유머를 아는 멋진 분이셨거든.”
그가 어머니 품 같은 불암산의 숲길을 걸으며 나직이 말했다.





글 김선미(작가) 사진 나영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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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D0000028037025 등록일 2016-11-15
분류 기타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라이선스 CC BY-NC-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