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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외길, 전태수 수제화 장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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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수제화 거리에 들어서니 신발 부자재들을 옮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성수동 수제화 거리에 들어서니 신발 부자재들을 옮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발은 기자에게 보물과 같다.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자판을 두드리는 손 보다, 발의 역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장 구석구석을 많이 누볐을 때 비로소 좋은 글이 나온다. 경험상 발로 많이 뛸수록 기사의 질은 달라졌다. 그래서 취재를 다닐 때는 어쩔 수 없이 편안한 신발을 찾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발을 누구보다 소중히 다루는 사람이 있다. 47년 경력의 수제 구두 제작 기술을 지닌 전태수 수제화 장인이다. 기자는 그가 운영하는 ‘JS슈즈 디자인 연구소’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47년간 수제 구두만을 만들어 온 전태수 수제화장인

47년간 수제 구두만을 만들어 온 전태수 수제화장인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구두 기술을 배웠어요. 어렸을 적 아버지도 시골에서 뭐든지 다 만드는 대장장이었는데, 낫, 칼, 호미와 같은 연장을 다 만들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도 장인이었어요.”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보다. 전태수 수제화 장인의 47년이 존재하기 까지, 장인의 삶을 지닌 그의 아버지가 계셨다. 전태수 대표가 구두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건 1969년이었다. 그 당시에는 정부 주도 개발 정책으로 농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활 터전을 도시로 옮겼다.

1960~70년대 한국 경제는 봉제, 섬유, 신발 등의 경공업이 역점적으로 추진되며 높은 고도성장을 이뤘다. 전 대표는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을 당시의 기억을 ‘가슴 아픈 이야기’라고 표현했다.

전태수 수제화장인이 라스트(신발을 만드는 발 조형물)를 깎고 있다

전태수 수제화장인이 라스트(신발을 만드는 발 조형물)를 깎고 있다

“그때는 먹고 살려고 서울에 와서 구두를 배웠어요. 공기도 안 통하는 지하실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다락방에서 먹고 자고 그렇게 배우면서 고생했지요. 고생을 책으로 쓰려면 12권도 더 쓸 거에요. 정말 고생 많이 했죠.”

산업화 초기 수출 주도 공업화에 따라 도시에는 저임금 노동 인력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정부주도 경제개발 정책과 함께 농업을 경공업이 대체하면서 공장 근로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전 대표는 대한민국 수제화 역사를 나타내는 산증인이다. 영등포를 시작으로 서울역 염천교 인근 구두골목을 거쳐 명동에서 구두 패턴과 디자인을 배웠다. 현재 자리 잡고 있는 성수동 수제화 거리에 들어온 것은 1980년이다.

성수동은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수제화 거리가 형성됐다. 특히 IMF 외환위기를 전후로 수제화 제품, 부자재 등의 공장들이 성수동으로 많이 이전했다. 전 대표도 IMF를 전후로 큰 변화를 겪었다. IMF 때문에 10년간 쌓아온 모든 것을 잃고 거리로 쫓겨난 것이다.

전태수 수제화 장인의 삶의 철학

한번 크게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지닌 기술이 한몫했다. 평생을 업으로 삼은 수제화 기술 덕분에 다시 취직을 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후에도 전 대표의 수제화 외길 인생은 계속됐다.

“나는 한 우물만 팠어요. 이거 안 된다고 저거하고 여기서 물 안 나온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안 나와도 계속 한 우물만 팠죠. 고집도 좀 있었어요.”

전태수장인이 만든 수제화구두

전태수장인이 만든 수제화구두

오랜 기간 수제화를 만드는 과정에 많은 희로애락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데는 구두에 대한 그의 철학이 크게 작용했다.

“구두에 기술자의 혼을 담아요. 구두가 아니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오기와 근성이 필요하죠. 그냥 힘들다고 포기하는 사람도 많은데, 어떤 직업을 가졌더라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근성이 있어야 해요.

그는 요즘 마라톤을 취미로 즐긴다. 전 대표가 마라톤에 입문 한지는 1년 반. 처음 5km 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거리를 늘려갔고, 풀코스 완주도 한 번 했을 정도로 아직 체력은 거뜬하다.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계속 가면 되는데, ‘못한다’고 생각하면 포기에요. 마라톤과 마찬가지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본인을 이겨야 돼요. 포기하지 말고 남들이 못한 것도 해봐야 해요. 내가 조금 젊었으면 남극탐험 이런 거 정말 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수제화 제작 기술을 배우는 학생 배움터로서 역할

전 대표가 운영하는 연구소는 여러 가지 구두 패턴을 개발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간이다. 이곳은 ‘서울 학생 직업체험 교육기부 인증기관’으로 선정되어 2017년 7월 28일까지 수제화 제작 기술의 맥을 잇는 서울시 학생 배움터로도 운영된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수시로 학생들이 찾아 왔다.

기자는 전 대표에게 디자인 교육에서 현장의 중요성을 물었다. “구두 만드는 과정을 실제로 직접 보잖아요. 보는 것만 해도 교육이에요. 직접 보고 실습을 해 보는 거죠. 자기도 똑같이 만들어 보고, 신발 나오는 과정을 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해 볼 수 있어요.”

전 대표의 말에 따르면 수제화는 6번의 공정을 거쳐서 만들어 진다. 가장 먼저 디자인을 하고, 디자인이 나오면 라스트(틀형)를 선정한다. 그 다음 디자인 패턴이 그려지면 재단과 갑피(재봉)가 이뤄진다. 마지막 포장으로 마무리한다.

수제화제작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 모습

수제화제작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 모습

학생들은 이론 중심의 학교 교육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구두 제작 전 과정을 직접 경험한다. 그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자기 나름대로의 색깔을 가지고 구두를 만들 때 신발에 대한 선을 볼 수 있어야 해요. 선이 살아 있으면 신발이 살죠. 같은 신발을 만들어도 선이 샤프심 하나의 차이에 따라 달라져요. 선을 볼 줄 안 다음에는 정확도를 봐야 하고, 마무리도 매우 중요해요.”

결국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 수 없으니 인식을 시켜주고 가르쳐 주는 게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이 전 대표의 주장이다. 학생들에게 설명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 오고, 스스로 잘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반복해서 연습하고, 계속 실습 하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끊임없이 계속 본인이 만들어 봐야 안다.

`구두는 패션을 완성하는 자미가 포인트이자 건강을 지탱하는 자기관리의 시작이다`

`구두는 패션을 완성하는 포인트이자 건강을 지탱하는 자기관리의 시작이다`

현재 전 대표의 연구소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기간은 평균적으로 4~5개월이다. 신발의 특성 상 최소 4계절을 다 경험해 봐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4~5개월은 짧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전 대표는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며 꿈의 씨앗을 심고 있다.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구두 박물관을 세우는 목표를 향해 그는 지금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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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외길, 전태수 수제화 장인을 만나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시민기자 이상국 생산일 2016-06-15
관리번호 D0000026453173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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