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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 주리라는 것을 알면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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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뉴시스

배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큰 병통이 있는데, 다행히 네게 해당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첫째, 외우는데 민첩한 사람이 있는데 그 폐단은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요,
둘째, 글 짓는데 빠른 사람이 있는데 그 폐단은 들떠 날리게 되는 것이요,
셋째, 이해를 빨리 하는 사람인데 그 폐단은 거칠게 되는 것이다.
무릇 둔하지만 계속 파고들면 그 구멍이 넓어지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며, 답답한데도 연마하면 그 빛이 윤택하게 되는 법이다. 파고들어 가는 것도 부지런함이요, 뚫는 방도도 부지런함이요, 닦는 방법도 부지런함이다. 이 부지런함을 다하기 위해 마음가짐을 확고히 해야 한다.
--정약용 <권학문>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94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만난 열다섯 살의 제자 황상은 아마도 명민한 수재가 아니었나 보다.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머리가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공부를 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스승에게 토로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똑똑하지 않은 대신 정직하고 겸손한 제자에게 정약용은 ‘공부하는 법’을 한 수 가르쳐 준다. 이른바 <권학문>으로 알려진, 오직 부지런함과 부지런함과 다시 부지런함을 일깨우는 글이다. 민첩하게 외운다고, 글을 빨리 짓는다고, 이해를 빨리 한다고 자만하지 말고 마음을 다잡고 끝없이 연마하는 것만이 학문의 정도(正導)라는 가르침이다.

기실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더욱 따르기 어려운 방도다. 그렇지만 원칙이다. 원칙이란 본디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비범한 것이므로.

그런데 다산의 <권학문>을 곱씹어 읽을 때 느끼는 또 하나의 감정은, 글이 매우 따뜻하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외우는데 민첩하고 글 짓는데 빠르고 이해를 빨리 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이 <권학문>이 필요했던 황상은 그런 특질을 하나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천재인 다산 앞에 꿇어앉은 열다섯 살짜리 소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몇 번을 반복해 읽고 쓰게 해도 까먹고 또 까먹었을 것이다. 글을 지으라 하면 한나절 내내 멈칫거리고 더듬더듬하였을 것이다. 아무리 풀어 설명을 해도 스톤헤드인지 석두인지 돌머리인지 아무래도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자식이면 이미 주먹이든 곰방대든 뭔가가 날아갔을 터, 다른 사람의 자식은 내가 가르치고 내 자식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가르쳐야 한다는 맹자의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가 다시 한 번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다산은 행여나 황상의 마음이 다칠세라, 둔하고 막히고 답답한 것이 오히려 장점이요 재산이라 격려한다. 자기가 모자라다는 것을 알기에 가장 괴롭고 두려운 것은 자기 자신일 터, 상처입어 좌절하지 않도록 약점을 강점으로,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가르친다. 아이들은 누구 하나만이라도 끝까지 자신을 믿어 주리라는 것을 알면 포기하지 않는다. 공부든 삶이든.

평생토록 다산의 가르침을, 둔재인 자신을 믿어준 스승을 기억했던 황상은 76세가 되던 해 <임술기>라는 글에서 그때 받은 사랑을 이렇게 회상한다.

“스승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 동안, 독서를 폐하고 쟁기를 잡고 있을 때에도 마음에 늘 품고 있었다. 지금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글 속에서 노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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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김별아(소설가) 생산일 2015-10-02
관리번호 D0000023735247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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