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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려 있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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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원아이

인간은 무언가에 ‘홀려있는’ 때가 가장 좋은 때다.
성공하여 안락해지면 그때가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때다.
--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2

삶은 수많은 유혹에 둘러싸인 미끄러운 유리 원반 위의 팽이와 같지만, 진실로 무언가에 ‘홀려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홀림이란 유혹에 완전히 빠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다. 옛사람들은 홀림에 빠져드는 까닭을 (반드시 꼬리가 여러 개 달린)여우라든가 도깨비라든가 귀신 따위의 장난이라고 믿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기에 정체를 알 수 없고, 정체를 모르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쓴다. 그래야 현실을 똑바로 보고 다가올 위험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처럼 안전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대체로 열정을 희생해야 한다. 어쩐지 자기계발서의 제목 같긴 하지만, 열정이 없으면 도전도 없다. 도전이 없으면 실패도 없다. 물론 성공도 있을 리 없다. 평범한 필부필부의 삶을 원한다면 아무 것에도 홀리지 않기 위해 여우와 도깨비와 귀신이 나타나는 한밤중의 어두운 뒷골목을 피해 대낮에 뻥 뚫린 큰길만 다녀야 한다.

홀림의 다른 이름은 매혹이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가 말하는 홀림은 정신을 놓았다거나 거짓에 현혹된 상태가 아니라 바로 매혹, 도취와 몰두의 단계를 말한다. 매혹되었을 때 사람은 앞뒤좌우를 재서 계산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만 자신이 강렬하게 원하는 그것에 빠져든다. 그 단계가 더욱 발전하면 자신마저 잊는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른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예술이든 일이든 연구든 새로운 발견이든... 역사는 ‘홀려있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성공과 실패조차 따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마침내 성공했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언제나 삶에 이롭지만은 않다. 목표를 달성하고 성취의 결과물로 부와 명예를 얻고 난 후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오만해지거나 태만해지고, 둘 다인 경우도 수다하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겸손한 탐구심을 발견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공한 후에도 스스로 부드러운 둥지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거침없이 폭풍 속에 나선다. 그들은 세속의 성공을 넘어선 자기 삶의 영웅이다.

토인비의 패러독스는 “열악한 환경은 위대함을 만들고, 온화한 환경은 유약함을 만든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물론 나는 그 해석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장애가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가 더욱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평범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굴복한다.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극복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존심의 훼손과 욕망의 굴절을 경험한다. 그래서 자수성가형의 야심가들이 며느리 늙어 시어머니 되는 꼴이 왕왕 있는지도 모른다.

‘홀려있는’ 그때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꿈꾸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홀려있는’ 자는 정착할 수 없을지언정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삶이라는 아주 긴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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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려 있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김별아(소설가) 생산일 2015-07-10
관리번호 D0000022883967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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