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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타고 떠나는 '서울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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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로터리 버스정류장에 ‘여운형 활동터’라는 이름이 병기되었다.

혜화동 로터리 버스정류장에 ‘여운형 활동터’라는 이름이 병기되었다.

1923년 1월 22일 새벽, 일본 군경 천여 명이 지붕 위의 한 남자를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남자는 세 시간 동안 총탄 세례를 피하며 총격전을 벌이다가 최후의 한 발로 자결했다. 그의 시신에서는 11발의 총상이 발견되었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이 날의 주인공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으로 잘 알려진 김상옥 의사였다. 종로구 효제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가 생의 마지막을 맞은 곳도 이곳이었다. 그의 장렬한 순국을 기리며 ‘효제동 버스정류장’‘김상옥 의거터’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서 있는 김상옥 의사 동상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서 있는 김상옥 의사 동상

2월 22일부터 서울 시내 마을버스 정류장 두 곳을 포함한 14곳의 버스정류장 이름에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서울역사박물관’ 역에는 ‘김구 집무실(경교장)’ 표기가 더해지고, 인사동 입구는 ‘인사동 들머리, 3.1운동 선언 터’가 되었다. 반가운 소식에 길을 나서 몇 군데 정류장을 찾아보았다.

21일 오후, 버스정류장에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이름을 병기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21일, 버스정류장에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이름을 병기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곳에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김상옥을 기려 효제동 버스정류장에 ‘김상옥 의거터’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사진3_교체된 정류장 표지판에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병기되었다.

독립운동가 김상옥의 활동터임을 기려 효제동 버스정류장에 ‘김상옥 의거터’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대학로로 이어지는 ‘효제초교, 연동교회’ 버스정류장에는 ‘김마리아 활동터’가 병기되었다.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한 김마리아는 요즘 말로 걸크러시 그대로였다. 일본 유학 시절 2.8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2.8독립선언서를 숨긴 기모노를 입고 들어와 부산과 대구, 광주, 서울을 돌며 3·1운동을 사전 준비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겪은 고문으로 한쪽 가슴을 절개해 평생 좌우 높이가 다른 저고리를 입고 살았으나 “조선의 독립과 결혼했다”던 그의 양심은 계속되던 신사참배 요구에도 흔들림 없이 반듯하고 정의로웠다.

‘효제초교, 연동교회’ 버스정류장에는 ‘김마리아 활동터’를 병기하며 김마리아에 대한 소개도 함께 안내하고 있다.

‘효제초교, 연동교회’ 버스정류장에는 ‘김마리아 활동터’를 병기하며 김마리아에 대한 소개도 함께 안내하고 있다.

1947년 혜화동 로터리에서는 독립운동가로서 임시정부 수립에 이바지하고, 해방 후에는 남북을 아우르는 독립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정치가 여운형이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우익 청년으로 알려진 가해자는 여운형이 탄 차를 가로막고 범퍼 위에 올라서서 총격을 가했다. 당시 이승만을 위시한 권력자들은 그의 암살 계획을 외면하고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았지만 뜻밖의 비보에 시민들은 너나없이 통곡했다.

백여 명의 청년이 깊은 슬픔에 잠긴 시민들의 눈물 속에 여운형의 꽃상여를 운구했다. 그 가운데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도 있었다.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이던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난 바 있었다.

혜화동 로터리 우체국 앞에 건립된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 표지석

혜화동 로터리 우체국 앞에 건립된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 표지석

여운형 선생은 동포들에게 “나뉘면 쓰러질 것이요 합하면 일어서리라”고 호소했지만 남과 북은 여지껏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그의 서거지 앞에 서서 지금이라도 오롯이 남과 북의 동포가 그 뜻을 실현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 전시회에 전시 중인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조소앙 친필)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 전시회에 전시 중인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조소앙 친필)

일본에서 울려 퍼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앞서 만주와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2.1독립선언이 있었다. 우리나라 독립선언의 씨앗과도 같았던 이 독립선언서의 작성자 조소앙이 한때 성북구에 살았다. 임시정부 외교부장으로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을 통해 독립을 보장 받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그는 해방 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신탁통치안과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했다.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남과 북을 오가며 고전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주권과 영토가 완성되지 못했다고 대한민국을 거부하면 안 된다”며 정부수립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자신이 설파하던 삼균주의를 실현하고자 1950년 5월 총선거에서 성북구에 출마해 전설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를 기억하기 위하여 혜화문 밖 ‘삼선교 한성대학교’ 정류장에 ‘조소앙 활동터’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된 만해의 심우장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된 만해의 심우장

내친 김에 1111번 버스를 타고 ‘서울다원학교, 한용운 활동터’ 정류장에 내려 심우장을 찾았다. “남향하면 바로 돌집(조선총독부)을 바라보는 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좀 덜 들고 여름에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좋겠다”고 집의 방향을 바꿨다는 일화로 유명한 곳이다.

만해는 이 춥고 더운 집에서 십 년을 넘게 지내며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했다. 1937년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김동삼의 유해를 모셔와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고 한 유언을 받들어 화장한 유해를 한강에 뿌린 만해가 일생에 한 번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심우장 입구에 조성된 만해 상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심우장 입구에 조성된 만해 상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다원학교에 다녀간다는 한 시민이 정류장에 붙어 있는 설명을 얼핏 보더니 “이곳이 한용운 생가였나 보죠?”라며 물었다. 심우장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얘기하며 오늘부터 정류장에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이름이 병기된다고 하자 젊은이들을 위해서도 정말 좋은 일이라고 반색을 했다.

“일상에서 독립운동가를 선양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는 서울시 관계자의 말과도 같은 입장이었다. 서울시는 이번 열네 곳을 시작으로 서울 전역 버스정류소 100곳으로 사업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또 다시 전쟁의 참화를 겪고 폐허에서 삶을 일구느라 온전히 과거를 털어내지도 못했다. 기억하고 기려야 할 일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이제야 몰랐던 이름들, 잊고 있던 이름들을 부른다. 비로소 백 년 전 역사가 우리의 현실로 이어진다. 한없이 고맙고 한없이 죄송하다. 지난 백 년 미처 되살리지 못했던 뜻이 다시는 멈춤 없이 조국의 산하에 퍼져나가기를 기원하며 3.1절 100주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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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타고 떠나는 '서울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시민기자 이선미 생산일 2019-02-25
관리번호 D0000035653727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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