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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랑] 요즘 더 궁금한 맛, 원조 평양랭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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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서울 냉면, 평양 랭면

평양냉면이 다시 화제다. 평양에는 그 도시의 냉면이 있고, 서울에도 평양냉면이 많다. 두 도시는 냉면으로 이어져 있다. 이미 오래전 일이다.

북한 정부와 평양시가 가장 자랑하는 음식, 냉면

연전에 서울시에서 남북 교류 아이디어 현상 공모 사업을 했다. 실은 나도 이 사업에 아이디어를 냈다. 서울은 평양보다 평양냉면집이 더 많고 인기 있는 도시다, 평양은 원조 도시다, 두 도시가 냉면으로 교류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놀랍게도 이 제안이 3등상인가에 당선되었다. 정치적 교류도 중요하지만, 오랫동안 서먹서먹했던 사이는 원래 음식으로 푸는 게 답이다. 술 한 잔 곁들여 음식을 먹다 보면 마음도 풀어지게 마련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정상이 나눈 음식 중에 평양냉면이 있었다. 조리복을 입은 북한의 옥류관 요리사들이 뽑은 면을 들고 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면이 불을까 봐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평양냉면은 북한이 가장 첫 번째로 내세우는 자랑스러운 음식이다. 외국에 나가 있는 식당에서 냉면을 팔지 않는 걸 본 적이 없다. 김일성과 김정일 위원장 부자도 하나같이 이 냉면을 자랑했다. 7.4 남북공동성명,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교류에서도 냉면은 빠지지 않았다. 북한 지도자들은 아예 냉면 소개 책자 앞에 큼지막하게 대략 이런 말을 써 놓고 있다.

“평양 랭면은 민족의 자랑스러운 음식입니다. 이 좋은 음식을 잘 보존하고 더 많이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북한의 냉면 조리서를 여럿 찾아보았는데, 문장은 다르지만 비슷한 내용이 꼭 들어가 있었다. 실제로 옥류관 말고도 평양에는 냉면 파는 식당이 여럿 있는데,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외국 기자의 방문기가 많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냉면을 먹었는지는 잘 모른다. 고려 시대에도 냉면이란 말이 나온다. 대체로 현재와 같은 냉면이 확립된 것은 조선 중·후기 이후로 본다. <동국세시기>(1849), <시의전서>(19세기 후반)에 냉면을 언급한 대목이 있는데, 현재의 냉면과 유사하다. 이때 이미 평양냉면이 이름을 날렸다. 일제강점기에 창간한 유명한 잡지 <별건곤>의 평양 탐방 기사 한 대목을 읽어보자.

“이것은 겨울의 냉면 맛이다.
함박눈이 더벅더벅 내릴 때 방 안에는 바느질하시며
<삼국지>를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만
고요히 고요히 울리고 있다. 눈앞의 글자 하나가
둘, 셋으로 보이고 어머니 말소리가 차차 가늘게
들려올 때 ‘국수요~’ 하는 큰 목소리와 같이 방문을
열고 들여놓는 것은 타래타래 지은 냉면(冷麵)이다.
살얼음이 뜬 김장 김칫국에다 한 저 두 저 풀어 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 이요! 상상이 어떻소!”

-<별건곤(別乾坤)> 1929년 12월호, 김소저의 ‘사시명물 평양냉면’ 중에서

서울에도 오랜 역사의 냉면집들이 있었다

이것은 집에서 냉면을 눌러 먹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냉면은 겨울 음식이었다. 그 이유가 있다. 첫째, 메밀은 초겨울에 주로 수확한다. 시원한 동치미나 김칫국이 있어서 말아 먹을 수 있다. 돼지나 닭, 꿩을 잡는 것은 아무래도 농한기인 겨울의 일이다. 이래서 냉면은 겨울에 이가 시리게 덜덜 떨며 아랫목에 앉아 먹는 음식이었다. 이 장면을 묘사한 시인이 있다. 너무나도 유명한 백석(1912~1996)이 냉면을 소재로 시를 썼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시 ‘국수’ 부분으로, 1941년 <문장>에 발표.
*‘히스무레’는 희끄무레, ‘슴슴하다’는 간이 자극적이지 않고 심심하다, ‘쩡하니’는 차갑고 시원한 것, ‘동티미’는 동치미, ‘댕추가루’는 고춧가루를 이르는 말.

집에서 눌러 먹던 냉면은 이내 상업화의 길을 걷는다. 시내에서 사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빙 공장이 생기고 고기 소비가 늘면서 김칫국 대신 고기로 육수를 내어 대중화에 성공했다. 1930년대에는 이미 평양과 서울(경성)에 냉면집이 꽤 많았다. 냉면집 배달부가 파업을 했다는 기사가 신문에도 여러 건 실렸을 정도로 흔한 음식이었던 모양이다.

서울 최초의 냉면집은 우래옥(1946~)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해방 후 최초에 해당하고, 실제로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서울에 냉면집이 많았다고 한다. 고종이 즐겨 먹었다고 하여 ‘고종냉면’이라고 부르는 면이 일제강점기 초기의 요릿집에서 재현되어 팔렸다. 또 서울이 본격적인 식민 도시로 성장할 무렵 많은 냉면집이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서울은 본격적으로 냉면집의 격전지(?)가 된다. 원래 겨울 음식이었지만 여름 별미로 자리 잡으면서 여러 가게가 창업한다. 해방 공간(해방 후 정부 수립까지의 기간)에 많은 냉면집이 다시 발행하기 시작한 <독립신문> 등에 실은 개업 광고를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보면 서울이 평양 못지않은 중요한 냉면 도시임을 자부해도 될 듯하다. 평양은 원조, 실제 가장 널리 퍼진 곳은 서울인 셈이다. 평양냉면 먹는 법에 대해서는 한동안 왈가왈부가 많았다. 대략 이런 문제였다.

면스플레인? 하나로 통일된 정석은 없다

첫째, 가위로 면을 자르지 않는다. 면은 길어서 장수를 상징 하는데 그걸 자르면 어쩌냐는 게 평양 사람들의 주장이다. 면이 너무 짧으면 물리적 촉각이 줄어서 씹는 맛, 목 넘김이 떨어진다. 그러나 아이나 씹는 힘이 떨어진 분이라면 잘라 먹어도 당연히 무방하다.

둘째, 식초와 겨자 논쟁이다. 한동안 서울의 냉면 마니아들은 이것을 넣지 않고 먹는 게 미식가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그러던 중에 이번 남북예술단 교류에서 평양발(發) 동영상 하나가 화제가 됐다. 옥류관 냉면에 식초, 겨자는 물론이고 붉은 양념도 넣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평양도 냉면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니 이것이 오랜 전통인지는 알 수 없다. 이유도 해석이 많다. 과거 냉면 육수는 위생이 걱정되어 식초로 소독해서 먹었다는 얘기다. 너무 차가운 음식 때문에 배탈이 날 수도 있으니 겨자로 더운 기운을 보충한다는 말도 있다. 붉은 양념(고춧가루)은 전통적으로 냉면집 식탁에 고춧가루 단지가 놓여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역시 전통이 오래된 것 같다.

서울에는 서울의 냉면이 있고, 평양에는 평양의 랭면이 있다. ‘냉랭’한 것들이지만, 오히려 그 속에 뜨거움을 식히는 절묘한 기운이 있다. 마음은 뜨겁게, 교류 사업은 냉정하게 서로 의견을 모아서 민족의 교류가 오래 이어졌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냉면 한 그릇 하러 가야겠다. 냉면 만세!

박찬일은 ‘글 쓰는 셰프’로 불리는 요리사 겸 칼럼니스트. 저서로 <백년식당>, <노포의 장사법>, <미식가의 허기> 등이 있다. 맛과 글에 대한 칼럼을 각종 일간지에 연재하고 있으며, 현재 ‘로칸다몽로’와 ‘광화문국밥’에서 일하고 있다.

*‘면스플레인: 면’과 설명하다를 뜻하는 ‘explain’의 합성어. 냉면은 반드시 어떻게 먹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언행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글 박찬일(음식 칼럼니스트)
출처 서울사랑 (☞원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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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서울사랑 생산일 201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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