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서울
개화산에 울려 퍼진 6월의 진혼곡
문서 본문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
매년 6월이 되면 동작동을 찾아 ‘현충일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올해는 이름 없는 현충시설에서 진행된 ‘작은 위령제’에 참석해 현충일을 기념했다. 김포공항이 훤히 보이는 개화산 어느 골짜기, 이곳에서 지난 8일 오전 11시, ‘제25회 개화산전투전사자 충혼 위령제’가 진행되었다. 전방지역도 아닌 서울 도심에서 ‘충혼위령제(忠魂慰靈祭)’라니, 대체 무슨 사연일까?
이야기는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당시 황해도 연백지역을 지키고 있던 육군 제1사단은 한강을 건너 김포지구로 후퇴한다. 전략적 거점 시설인 김포비행장을 사수하고 서울로의 공격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개화산에 최후 방어 진지를 구축한다. 통신이 두절되고 탄약보급이 끊기는 악조건 아래에서 6월 26일부터 6월 30일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전투 결과, 생존자 37명을 제외하고 국군장병 1,100여 명 전원이 개화산 골짜기에서 장렬히 산화(散華)한다. 만약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북한군은 계획대로 한강 이남을 차지하고, 전쟁은 3일 만에 종결되었을 것이다.
휴전 이후 긴 세월이 흘렀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 장병을 기억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한국전쟁사에서 잃어버린 부대로만 기록되어 오다 1992년에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에 전사자 유족과 뜻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비건립추진위원회’를 결정했다. 그리고 1994년 6월 28일에야 비로소 ‘호국충혼위령비(護國忠魂慰靈碑)’를 건립했다.
팔각형 비석 받침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연꽃, 그 위에 4.7m 비석을 사뿐히 올려놓은 위령비(慰靈碑)를 건립했다. 그 옆에는 1,100여 명의 전사자 명각(名刻)과 참전유공자와 무공수훈자 및 생존자 명각을 건립했다. 위령비는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지만, 김포공항을 내려다보며 서있다. 그 모습에서 영원히 조국을 지키는 불사조가 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2002년 11월 22일 국가보훈처는 ‘호국충혼위령비’를 ‘현충시설 제10-2-6호’로 지정했다.
이날 위령제는 오전 11시부터 한 시간 동안 개화산전투 전사자 추모사업회와 유족회, 각 보훈 단체 및 관계기관 관계자, 육군 제1사단 장병, 일반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하여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초하의 짙푸른 개화산 골짜기에 진혼곡이 은은히 울려 퍼졌다. 기념사와 추념사, 헌화 및 분향, 넋풀이 공연을 진행하며 호국영령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전사자추모사업회 양승춘 회장은 “이렇게 6월에 위령제를 지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올해 계획한 추모 조형물 건립사업이 잘 추진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육군 제1사단 부사단장은 기념사를 통해 “선배님들의 호국정신을 본받아 군인으로서 위국헌신의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자 많은 장병들과 함께 참석했다”고 말했다.
방화동에 거주하는 주민 K씨는 “사실 위령비는 무심코 개화산을 찾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우리 마을 뒷산이 6.25 당시 엄청난 희생을 낸 격전기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내년 위령제에는 꼭 아이와 같이 오겠다”며 전사자 명각을 둘러보았다.
취재를 마치고 떠나는 기자의 귓가에 나지막한 호국영령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는 자랑스러운 내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숨지었나니, 영광스런 대한민국의 군복을 입은 채 유쾌히 쉬겠노라.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를 벗 삼아 이곳 개화산 풀숲에서…”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
본 콘텐츠는 서울시'내 손안에 서울'에서 게재중인 콘텐츠 입니다. 내 손안의 서울
문서 정보
원본시스템 | 내손안에서울 | 제공부서 | 콘텐츠담당관 |
---|---|---|---|
작성자(책임자) | 시민기자 최용수 | 생산일 | 2017-06-15 |
관리번호 | D0000030432944 | 분류 | 기타 |
이용조건 | 타시스템에서 연계되어 제공되는 자료로 해당기관 이용조건 및 담당자와 협의 후 이용하셔야 합니다. |
라이브리 소셜 공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