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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두 번이나 죽었다 살아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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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탄 숭례문이 최근 복원 공사를 마치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5년 전 한 정신 나간 노인의 방화로 불타던 숭례문은 서울 시민은 물론 국민 모두를 충격과 비통에 빠뜨렸다. 불길에 휩싸인 남대문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맥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던 국민은 분노와 안타까움에 더해 누구나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참화가 조선 시대 한두 건물이 아니라 서울 전역, 아니 전국에서 일어난 적도 있었다. 그것도 두 차례나!

▲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는 1952년(선조 25년)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부사


동아시아를 뒤흔든 임진왜란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한 7년간의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대대적인 변화를 몰고 온 근세 최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이 붕괴되었고, 전국이 전쟁터가 된 조선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으며,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한 명나라도 결국 멸망의 운명을 맞이했다.

 동아시아 삼국이 전쟁에 휘말려 피 흘리는 동안 만주에 웅거하고 있던 여진족은 서서히 힘을 비축해 통일 제국의 토대를 마련하고 청나라를 세워 명을 멸망시킨 후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각국의 흥망성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이었다.

 나라 전체가 온통 전쟁터가 된 조선은 정권 교체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전국이 초토화되었으며, 특히 서울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도성 수복 직후 명나라 군대와 함께 서울로 돌아온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모화관에서부터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성안에는 죽어 넘어진 사람과 말이 수를 셀 수 없으며, 냄새와 더러움이 길에 가득하여 사람이 가까이 갈 수조차 없다”라고 탄식하고 있다. 그만큼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극심했다.


죽은 왕들이 살아 있는 왜군 쫓아내기도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군한 일본군은 한강을 건너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동대문을 통해 손쉽게 도성을 점령했다. 도성을 수호한다던 조선의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백성을 버리고 이미 개성으로 달아난 뒤였다. 이 전쟁으로 200년을 지켜온 조선 왕조의 권위와 상징인 궁궐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궁궐 외에도 각종 관공서 건물과 성균관·종묘 등도 모두 일본군에게 짓밟혀 크게 훼손되었다. 오희문(吳希文)이 쓴 전란 일기인 <쇄미록(鎖尾錄)>을 보면 “성균관 건물 가운데 대성전·명륜당·존경각·식당·정록청 등이 전소되었고, 대성전 앞에 있던 비도 세 동강으로 잘려 나뒹굴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군은 또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도 불태웠다. 당시 서울에 입성한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통솔하는 1만 군대는 종묘에 주둔했는데, 그들은 종묘 건물이 조선 역대 왕의 신주를 봉안한 곳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상하게도 종묘에 주둔한 일본군이 밤마다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참혹한 괴변이 계속되면서 군사들이 연일 악몽에 시달리자 우키다 히데이에는 두려운 마음에 정전과 영녕전을 불사르고, 지금의 조선 호텔 자리에 있던 남별궁(南別宮)으로 진영을 옮겼다. 이는 아마 종묘의 신령이 나타나 일본군을 무찔러주었으면 하는 조선 민중의 염원이 빚어낸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일본군이 종묘를 불태운 것은 사실이다.

 그 밖에 북촌 일대의 전각을 비롯해 조선의 200년 건축 문화가 모두 이때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도성 안에 있던 백성의 민가는 전체의 70~80%가 불타 없어졌으니 그 참상은 이루 형언할 길이 없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정부는 궁궐과 종묘를 비롯해 불타 없어진 수많은 건물을 중건하는 등 전후 복구를 위해 인적·물적으로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부어야 했다.


천인공노할 만행의 참상

도성을 장악한 일본군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宣陵)과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파헤치고 도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선릉의 경우 시신이 없어지고 타다 남은 뼈만 있었으나 그것도 성종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릉의 경우 시신만 남았는데, 얼굴의 살은 녹아 없어지고 털이 빠졌으며, 콧대는 깨어지고 두 눈이 모두 빠졌으며, 턱이 떨어져 나가 입술도 없었다. 이 역시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런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이는 보화를 찾으려는 병졸의 계책이 아니고, 왜적의 장수들이 우리나라를 깊이 원수로 삼으려는 행위”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일본군이 우리의 유적에 대해 대규모 파괴 행위를 조직적으로 일삼았음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선정릉이 당시 큰 피해를 입은 현장이다. 그 밖에도 강릉(康陵)이 반쯤 파헤쳐졌으며,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와 덕빈(德嬪) 윤 씨의 시신은 전쟁 통에 장사도 지내지 못한 채 사라진 후 그 행방을 알지 못할 정도로 임진왜란의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왕족이 이러하니 힘없는 서민이야 오죽했을까!

▲ 선릉 / 남한산성 서문


남한산성과 삼전도의 굴욕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조선은 다시 전쟁에 휩싸였다. 1636년 12월 8일, 청나라 태종이 약 13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니,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청나라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이레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12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45일간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적과 소규모 접전을 벌이면서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였고, 한편으로는 강화 교섭을 전개하는 등 화전(和戰) 양면책을 구사했다. 이에 조선군의 열 배에 달하는 막강한 전력을 갖춘 청나라는 남한산성이 험난한 지형임을 고려해 전략상 산성을 포위한 채 고립 작전을 펼쳤다. 그러면서 강화 교섭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두 달도 안 되어 끝난 이 전쟁은 사실 시작부터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략 전술, 정보력, 군사력, 군수물자 등 모든 면에서 조선군은 청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외교를 통해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었음에도 조선은 현실을 무시한 채 명나라와의 대의명분에만 집착한 나머지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을 거부함으로써 화를 자초한 측면도 있었다. 자존심을 내세워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큰소리치던 조선은 막상 청군이 쳐들어오자 속수무책으로 이레 만에 도성을 내준 채 남한산성으로 도망치고 만 것이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상황에서도 조선은 화전(和戰) 양론으로 여론이 갈려 팽팽하게 대립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자와 대신들이 적군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야 여론이 강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으로서는 사실상 무조건 항복 외에는 전란을 타개할 어떤 방책도 갖고 있지 못했다. 결국 인조는 겨우 왕권 유지만 보장받은 채 청나라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힌 지 45일 만에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갖추었다.

▲ 천태종공덕비 / 수어장대


삼전도비와 환향녀의 유래

병자호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서울이었다.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옮겨간 후 45일 내내 무방비 상태로 버려진 도성은 청군의 무자비한 노략질로 텅텅 비고 폐허가 되었다. 도성 안 여염집과 상가들이 불탔고, 가축이나 곡식은 모두 약탈당했다. 미처 피란하지 못한 여인들은 겁탈당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저항하다가 살해되기도 했다. 항복 후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가장 먼저 도성에 널브러진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내는 일부터 해야 할 지경이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청군은 수많은 여성을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들은 노예 시장에서 노예로 팔려나갔다. 포로로 끌려간 여성들을 다시 데려오려면 돈을 지불해야 했는데, 무기력한 조정에서 대책을 세웠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끌려간 여자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다 해도 ‘정절을 잃은’ 이들을 받아줄 곳은 조선 어디에도 없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 패하고, 연약한 여성들이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기만 하던 조선의 나라님과 잘난 양반들은 이들에게 오히려 ‘정절을 잃었다’는 굴레를 씌워 문전박대하거나 백안시했으니, 이들을 두 번 죽인 꼴이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에서 ‘환향녀(還鄕女)’로 불렸는데, 냉대를 견디다 못해 많은 이가 자결하거나 평생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세자와 왕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질을 끌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비문을 건립하라고 조선에 요구했다. 이른바 ‘청태종공덕비’가 그것이다. 이 비는 1639년(인조 17년) 삼전도에 세웠기 때문에 ‘삼전도비’라고도 불렀으며, 한문과 만주어 그리고 몽골어로 글자를 새겼다. 이 비가 우리 민족의 치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여 한때 땅속에 묻어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페인트칠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치욕스러운 역사라도 엄연한 우리의 역사다. 비문을 없앤다고 해서 삼전도의 굴욕을 역사에서 지울 수는 없는 일. 오히려 이 비문을 보존해 대대로 지켜보며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그날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전쟁을 경험한 바 있다. 유익한 경험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명백하다. 결코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 8월호에는 ‘18세기 서울의 인문학적 사조’를 실을 예정입니다.
18세기 서울에 나타난 인문학의 새로운 경향으로 실학, 특히 북학파로 널리 알려진 백탑파의 이야기와 한문학의 새로운 풍조 그리고 중인을 중심으로 나타난 시단과 한글 소설의 유행 등을 다루고자 합니다.


글 이상배(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사진 제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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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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