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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북촌과 남촌 그리고 청계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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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울에 강남과 강북이 있다면, 조선 시대 서울에는 남촌과 북촌이 있었다. 그 경계는 청계천이었다.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 일대를 중심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지역이고, 남촌은 중구 필동을 중심으로 한 남산 북쪽 기슭일대다. 북촌에는 비교적 부유하고 권세 높은 양반 관료가 모여 살았고, 남촌에는 ‘딸깍발이 샌님’이라 불리는 가난한 선비와 서민이 주로 모여 생활했다. 따라서 북촌은 양반 문화가, 남촌은 서민 문화가 중심을 이루었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았나?


양반이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관료 집단인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로, 이들은 다양한 특권을 누리던 특권층이었다. 먼저 3품 이상의 관료 자제에게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문음(門蔭)의 특권을 주었다. 과거를 볼 때도 자격 조건부터 일반 양인과 양반이 달랐다. 양인은 과거 시험에 응시하고자 할 경우 한성부 5부 가운데 3부 관원의 추천을 받도록 해 현실적으로 과거 응시 자체가 쉽지 않았다. 반면 양반에게는 이런 제약이 없었다. 또 일반 백성이 위험한 변방에 나가 장기간 군역의 의무를 지는 것과 달리 양반 자제는 직업군인이 되어 왕궁이나 도성을 수비하는 군영에 배속돼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이런 기득권과 특권을 바탕으로 서울 북촌의 양반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경제력을 확대하는 것은 물론 풍족한 문화 생활을 누렸다. 북촌에 거주하는 양반 중에는 지방 출신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강원도·충청도·경기도 등지에서 운송해온 나무로 집을 짓고 지붕에는 기와를 얹었다. 또 안채와 사랑채를 별도 공간으로 구분해 남녀가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하도록 꾸몄으며, 일부 노비를 내려 보내 고향에 있는 토지를 경작하게 했다.


북촌과 달리 남촌에는 주로 서민과 일부 몰락한 양반이 살았다. 그렇다고 부유한 양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북촌에 비해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남촌에 사는 주민은 도성이라는 특성상 농민보다 관청의 하급 관리나 잡역부, 상점 점원, 과거 시험에 낙방한 지방 유생, 경제적으로 몰락하거나 권력에서 밀려난 양반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일부 권세 있는 양반은 남산 계곡 일대에 정자를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며 생활하기도 했다. 이렇듯 청계천 이남의 남촌에는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이 다채롭게 모여 살았고, 이들의 경제 사정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북촌과 남촌은 정치적 성향도 달라 오늘날의 서울과 비견된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 황현(黃玹)은 문집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서울의 대로(大路)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노론이 살았다.

 
그 남쪽은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당(三色黨)이 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촌에는 조선 후기에 권력을 장악한 노론 계열의 인물이 주로 거주하면서 정권을 주도하고, 남촌에는 정권에서 밀려난 소론·남인·북인 등이 뒤섞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직(淸職)에 발탁된 남인 최우형(崔遇亨)은 남촌에 살던 양반인데, 수레를 타고 북촌에 있는 궁궐로 출근할 때는 부채로 코를 가리면서 “노론의 냄새가 어찌 이리 고약한가?” 하고 당시 노론의 정치적 전횡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남촌과 북촌의 처지가 바뀌었다. 남촌 일대에 일본인 집단 거류지가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되고, 북촌 일대는 한옥만 남은 채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정치 1번지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종로 일대가 다시 정치 1번지가 되었다.


▲ 현재의 북촌 모습 / 남산골 한옥마을 양반가 전경


청계천 주변의 중인


중인은 양반과 상민(常民) 사이의 중간 계급에 속한다. 조선 시대의 중인은 중앙과 지방의 기술 관료, 서얼, 중앙의 서리와 지방의 향리, 토관(土官), 군교, 교생 등 다양한 계층을 망라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 전문직에 종사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양반에게서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상민보다 대우가 나았기에 중인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직업을 세습하면서 일반 상민과 구별되도록 노력했다. 이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양반·중인·상민·천인의 네 계급이 나타나게 되었다.


서울에 살던 중인으로는 중앙관청의 기술 관료인 역관·의관·지관·천문관·산관·화원·율관을 비롯해 서리와 서얼이 있었다. 이들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도 주로 청계천 일대를 중심으로 집단 거주하고 있어 광교 일대를 흔히 중인촌이라 부르기도 했다. 청계천 일대는 중앙 관서와 가깝기 때문에 하급 관리가 출퇴근하기에 편리했다.


역관은 오늘날의 동시통역사고, 의관은 의사이며, 지관은 풍수지리와 지리학에 능통한 사람이다. 천문관은 별자리를 관찰하는 사람이고, 산관은 수학자이며, 화원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서얼은 양반의 자손 가운데 첩의 소생을 말한다. 대부분 전문직에 종사했으며, 서얼만 예외였다. 이들은 각기 시험 과목이 다르지만 모두 과거 시험 가운데 잡과(雜科)를 거쳐 관리로 선발되었다.


중인 중에도 외국에 다닐 수 있는 역관이나 병자를 고치는 의관은 다른 관리보다 대우가 조금 나았다. 사역원에 소속된 역관은 중국이나 일본에 가는 사신단과 동행해 국제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내의원이나 혜민서 등에 소속된 의관은 왕족이나 양반의 병을 치료할 경우 일정한 부와 명성이 뒤따랐다. 그러나 병을 고치지 못하면 목숨을 잃는 위험도 감내해야 했다.


중인 중에는 서얼이라는 특별한 계층도 있었다.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되 진정한 양반이 아닌 사람들이다. 고려 시대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별로 없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이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들에 대한 차별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이들 서얼은 문과나 무과 및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했다. 이들은 얼치기 양반으로 대접받으며 별 수 없이 기술직에 종사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중인에 포함됐다.


조선 시대의 중인은 주로 행정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이들의 언행은 세련되고 생활은 깔끔했으며 대인 관계에 밝았다. 생활양식뿐 아니라 그들이 쓰는 문서 양식도 따로 있었으며, 시문도 독특해 중인 문화라고 할 만한 생활 규범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최고의 상권 종로와 시전 상인


조선 시대의 종로(鐘路)는 도성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메인 스트리트이자 상업의 최고 중심지였다. 이는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부터 미리 계획한 것으로, 정부에서는 종로에 상가 건물을 지어주고 상인은 여기에 입주해 장사를 했다. 당시에는 이를 시전(市廛)이라 불렀으며, 여기에 입점한 상인은 독점적 특혜를 누렸고, 국가는 이들에게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 국가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다.


종로 북쪽은 궁궐과 관아가 집중적으로 배치돼 상품을 생산하는 일과는 동떨어진, 오히려 각종 물품을 소비하는 지역이었다. 인구도 도성에서 가장 많이 밀집돼 종로는 서울에서도 최적의 상업적 입지를 갖춘 곳이었다. 이로써 종로 일대는 자연스럽게 도성에서 가장 번화한 소비 시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생필품 외에 사치품과 기호품 등 전국에서 생산한 최고의 상품이 모여들었다. 이 가운데 최상품은 궁궐에 먼저 진상하고, 그 다음에는 관아와 고관대작 등 양반집으로 들어갔다.


이런 종로를 시장 계획에 따라 크게 개발한 임금은 태종이다. 그는 1412년(태종 12년)부터 1414년까지 3년에 걸쳐 상설 점포를 설치해 상인에게 분양했는데, 이때 점포는 혜정교에서 동대문까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서 종로까지, 종로에서 남대문까지 설치했다. 행랑 2천여 칸을 짓고 분양하는 대규모 사업이었으며, 일부는 관공서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주축은 점포로 분양했다. 정부가 점포를 만들기 전에는 다양한 상품을 뒤섞어 판매했으나 행랑을 건설한 후에는 질서가 잡히고 정해진 지역에서 특정한 상품을 거래하면서 상거래가 안정을 찾았다.


이곳에서도 가장 중심을 이룬 점포는 육의전(六矣廛)이었다. 비단·무명·명주·종이·모시·어물을 판매하는 6종의 상점을 육의전이라 하며, 그 밖에도 미곡전·철물전·모자전·잡물전 등 다양한 물품을 판매하는 시전이 줄지어 있었다. 여기에서 장사하는 상인은 이른바 시전 상인(市廛商人)이라 불렀다.
약 300년간 이들 시전 상인은 조선 경제를 움직일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전 상인은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국가에 납품하는 모든 물품을 조달했으며, 개인 판매도 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특정 품목에 대한 전매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 한다. 예를 들어 도성 안에서 생선이나 젓갈 등은 어물전을 통해서만 판매할 수 있었으며, 다른 상인은 판매할 수 없도록 했다. 따라서 독점권이 있는 시전 상인은 막대한 이익을 보장받은 반면 상업 경제의 자율 경쟁 체제는 기대할 수 없었다.


한편, 시전 상인은 정부의 보호 아래 장사를 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는 대신 일정한 세금을 국가에 납부했다. 성종 때 반포한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시전 행랑 1칸을 사용하는 대가로 1년에 저화 40장을 납부했다. 대다수의 시전 상인은 여러 개의 행랑을 가지고 장사를 했으므로 그만큼 국가에 내는 세금도 많았다.


그러나 실제로 세금보다 더 큰 부담은 일종의 정치 자금 상납이었다. 시전 상인은 상품의 독점 판매권을 얻기 위해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고관들에게 뇌물을 상납해야 했고, 이러한 검은돈은 대부분 정치 자금으로 활용되는 등 부작용도 컸다. 이런 부작용이 있었지만 종로는 조선 최고의 상업 중심지로 오늘날까지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 1960년대 청계천 모습. 조선시대에는 중인들이 살았다


* 6월호에는 조선 시대 최대의 공업단지 요람이던 서울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입니다. 조선 시대 서울은 의류·그릇·무기·선박· 기와·종이·건축·토목· 활자·인쇄 등의 공업 분야 공장이 모여 있던 최대의 공업단지였습니다. 이곳에서 조선 최고의 전문 기술을 보유한 장인이 최고 품질의 산업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종로와 중구에 집중돼 있던 각 공업단지를 살펴봅니다.





글 이상배(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 연구원) 사진 제공 <서울 역사 2000년>,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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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역사 기행] 북촌과 남촌 그리고 청계천 사람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662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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