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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걸었던 길을 따라서…북한산 ‘숙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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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영루

눈 덮인 산영루, 북한산 그림자를 아름답게 빛추는 누각이란 뜻을 품고 있다

“서문 초입에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기개가 강건하고 마음이 웅대해져 내 근심 풀리네 / 나라 도성 지척에 견고한 금성탕지의 산성 있는데 / 백성을 어찌 버릴까, 한양을 꼭 지키리라”

1712년 4월 조선의 19대 임금인 숙종대왕이 서문(대서문)에 도착하여 완공된 북한산성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워 남겼다는 시(詩)이다.

북한산은 수도 서울의 진산(鎭山)으로 고대로부터 금성탕지(金城湯池, 견고한 방어요새)로서 전략적 중요성으로 주목받아 왔다. 조선은 남한산성이 있었음에도 유사시 종사의 안녕을 튼튼히 하기 위해 1711년(숙종37년) 10월 북한산성을 수축한다.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백성들과 함께 최후까지 항전하겠다는 여민공수론(與民共守論)의 결기가 담긴 성곽이다.

대서문

북한산성의 정문 중 하나인 대서문

국립공원관리공단 자료에 의하면 2016년 한 해 북한산 등산객은 608만 명에 이르고, 둘레길이나 잠시 북한산공원을 찾은 사람을 합하면 1,300만이 넘는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북한산을 찾지만 ‘숙종의 길’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북한산성을 완공한 다음해인 1712년 4월 숙종은 몸소 북한산성 행궁(行宮, 임시궁궐) 답사에 나선다. 산세가 험하고 가파른 동남쪽보다는 비교적 평탄하고 안전한 서쪽 길을 선택한다. 비록 상상이지만 기자는 당시 숙종이 되어 왕의 길을 따라 행궁까지 탐방을 했다.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서 대서문~북한동역사관~하창지~중성문~산영루~중흥사~호조창지~행궁지에 이르는 4.5km, 행궁을 답사한 최초의 임금이 숙종이어서 ‘숙종의 길’이라 불리어왔다.

‘숙종의 길’이 시작되는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는 지하철3호선 구파발역에서 버스(34번, 704번)로 환승해 북한산성입구정류장에서 내려 10여 분이면 도착한다.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오른쪽 차도가 ‘숙종의 길’로 이어진다.

10분쯤 지나면 커다란 대문이 나타난다. 홍예식 대문과 문루가 우뚝한 대서문(大西門)이다. 1958년 복원한 문루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쓴 현판이 붙어있다. 숙종이 되어 문루에 오르니 동서로 연결된 성곽과 북한산의 품에 안긴다. 숙종이 산성을 보고 어제시(御製詩)를 남길만한 감흥이 일었다.

북한동역사관

북한동의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북한동역사관

대서문(大西門) 홍예를 들어가면 산성 내부가 된다. 본격적인 ‘숙종의 길’은 대서문부터이다. 무량사를 지나니 넓은 공터 한쪽에 기와지붕의 ‘북한동역사관’이 서있다.

2010년 국립공원 정비사업 당시 성안에 있던 북한동 마을을 성 밖으로 내보내고 그 자리에 역사관을 세운 것이다. 북한동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역사관이다. 북한산성이 생긴 후 형성되기 시작한 북한동은 수문에서 태고사까지 한때 500여 가구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역사관을 지나면 중성문(中城門)이 나타난다. 1712년 4월 북한산성 답사 당시 숙종은 ‘지대가 낮은 서쪽은 적 공격에 취약하다’며 내성(內城, 겹성)을 쌓으라고 명한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로 중성(中城)이다.

행궁(行宮)과 승군사령부인 중흥사, 호조창 등 주요시설은 모두 중성 안에 집중되어 있다. 중성문의 문루는 1998년에 복원된 것으로 1958년 복원된 대서문과 비교하면 문루 복원기술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시체를 성 밖으로 보내던 시구문(屍柩門)과 성안의 빗물을 조절하는 수문(水門)이 중성문 인근에 설치되어있다.

중성문

중성문

중성문에서 몇 걸음이나 될까, 계곡 모퉁이에 날아갈 듯 깃을 세운 정자가 보인다. 북한산 그림자를 아름답게 비추는 누각이라는 ‘산영루(山映樓)’이다. 소문난 경승지여서 조선후기 성호 이익(1681~1763), 다산 정약용(1762~1836), 추사 김정희(1786~1856) 등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문(時文)을 남긴 곳이다.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 / 십여 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가고...” 다산이 산영루를 노래한 시(詩) 일부이다.

산영루를 지나면 중흥사(重興寺)를 만난다. 북한산성 축성 이후에는 산성 수비를 담당할 승군(僧軍)이 주둔할 사찰 11개를 창건했는데 이들을 지휘하는 승군사령부격인 사찰이 중흥사이다. 1915년에 홍수로 무너져 주춧돌과 축대만 남았으나 최근 일부시설이 중건되어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중흥사를 지나 1.0km를 더 오르면 호조창(戶曹倉) 터가 나온다. 호조창은 행궁 시 궁궐에 필요한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서, 행궁 가까이에 설치된다. 행궁지가 멀지 않았다. 호조창지 옆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드디어 ‘행궁지(行宮地)’가 보인다.

북한산성 행궁은 내·외전이 각각 28칸, 부속건물 68칸 등 총 124칸 규모였다고 한다. 최초로 숙종이 답사하고 이후 영조가, 정조는 세손 때 영조를 보좌하여 행궁을 다녀간다.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행궁지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행궁지

200년 넘게 건재하던 행궁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매몰되어 사라진다. 다행히 1900년대 촬영한 행궁 사진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현재 행궁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행궁 내전의 자리에 앉아보았다. 군 지휘소인 시단봉의 ‘동장대(東將臺)’가 우뚝하고 좌우로 연결된 성곽은 요새처럼 든든하다. 뒤편에는 백운대 노적봉 등 삼각산 영봉들이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유사시 행궁 하는 임금이라도 평정심을 잃지 말라는 듯 아름다운 풍경이 병풍을 둘러준다. 북한산 최고의 길지(吉地)에 행궁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00년대 행궁 전경

1900년대 행궁 전경

북한산에는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 있다. 그러나 ‘숙종의 길’만큼 편안하고 다양한 역사유적을 간직한 탐방로는 없다. 입춘을 지났으니 본격적인 산행 계절이 시작된다. 우리 조상들은 산을 찾는 목적을 유산(遊山, 자연을 즐김)이라 했다. 우리도 바쁜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여유를 낸다면 북한산이 품고 있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맘껏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가족 친구 연인들과 함께 유산하며 새봄 마중을 하고 싶다면 ‘숙종의 길’을 추천하는 이유이다.

■ ‘숙종의 길’ 탐방 정보
○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 서울시 은평구 대서문길64
○ 찾아가는 길 : 지하철3호선 구파발역에서 버스환승(704번, 34번 등) 산성입구정류장 하차
○ 탐방코스 :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 대서문 ~ 북한동역사관 ~ 하창지 ~ 중성문 ~ 산영루 ~ 중흥사 ~ 호조창지 ~ 행궁지(약 4.5km)
○전화 : 02-357-9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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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시민기자 최용수 생산일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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