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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우리에게 ‘필요’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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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새로 발명된 깃펜 깎이를 샀습니다.

깃펜을 깎을 때 번거롭지 않아서 정말 기쁘더군요.

하지만 그 물건의 존재를 몰랐을 때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어요.

페트라르카가 고작 커피를 못 마셔봤다는 것 때문에 불행했을까요?

--스탕달 《연애론(De l'Amour)》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4

아이의 친구 엄마 중에 ‘정리수납전문가’가 있다. 그녀의 주 업무는 스스로 정리정돈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간을 청소하고 재배치해주는 일인데, 그 외에도 부수적인 업무가 뒤따른다 한다. 엄청나게 넓은 대저택이 아닐 바에야 만만찮은 비용까지 지불해가면서 정리정돈 할 것이 얼마나 많을까 싶지만 그녀가 사진으로 찍어둔 ‘Before-After’를 보면 왜 전문가가 필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

평범한 집의 공간이라 해봤자 거실, 주방, 침실, 드레스룸, 베란다나 신발장 정도가 전부인데, ‘Before’의 사진에서는 실제로 그 구분이 거의 없다. 모든 곳에 물건이 층층이 겹겹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들은 최소한 물건들을 사서 쌓을 만큼의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미 가진 것을 또 사거나, 혹은 산더미 속에서 이미 샀던 물건을 찾지 못해서 다시 산다. 한 번 입고 던져버린 옷,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물건들이 숱하다. 그것이 짐이 되어 그들을 짓누르고, 그 엄청난 산더미를 파헤칠 일이 두려워 당장 필요한 만큼 또 산다.

정리수납전문가는 버리고 남길 것을 구분해 제자리에 배치하고 집주인에게 수납의 요령을 가르쳐준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부수적인 업무, 집과 짐을 이고 지고 살아가는 집주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 무기력을 증상으로 하는 우울증이나 그와 유사한 어떤 원인으로 마음을 앓고 있다. 최소한 가지고자 하는 욕망과 필요를 조절하는 절제 사이의 불균형이 병적인 수준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자본주의는 필요 이상의 물건을 과잉생산한다. 광고는 끊임없이 신제품을 선전하고 그것에 홀린 사람들은 지금까지 잘 쓰던 것들을 ‘낡은 것’으로 느끼며 던져버린다. 반짝반짝한 신생의 빛을 뿜는 새 것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열기 전 과소비에 대한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얼마나 편리하고 얼마나 효율적일 것인지, 그래서 자기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스탕달의 깃펜 깎이처럼 작은 물건 하나 때문에 기뻐지는 일은 꽤 있다. 나 또한 손 걸레질을 하는 대신 스팀청소기를 쓱쓱 밀고 다닐 때마다, 얼마 전에는 밤 껍질 깎이와 끝이 둥근 코털 가위를 사고 감탄했다. 문명의 이기에 혜택을 받으니 감사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아예 없었을 때에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불편했을 뿐이다. TV에는 온갖 ‘먹방’이 넘쳐나고 커피며 와인이며 기호식품에 전문가들까지 생겨나는 지경이지만, 르네상스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인 페트라르카가 커피를 못 마셔봤다고 불행할 가능성은 전무(全無)인 것처럼.

그렇다면 정녕 우리에게 ‘필요’란 무엇일까?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것이 행복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중의 하나, 아니 전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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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우리에게 ‘필요’란 무엇일까?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김별아(소설가) 생산일 2015-12-18
관리번호 D0000041753624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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