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서울

"일기는 고독한 위안이자 치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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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작가 김남영

일기는 고독한 인간의 위안이자 치유다.
날마다 기록되는 이 독백은 일종의 기도이자 영혼과 내면의 대화, 신과의 대화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혼탁에서 벗어나 평형을 되찾게 해준다.
의욕도 보장도 멈추고,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 평화를 갈구하게 된다.
일기를 쓰는 행위는 펜을 든 명상이다.
- 앙리 프레데리크 아미엘, 《아미엘의 일기》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9

나는 7살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아직도 고향집 창고에는 엄마가 라면 박스에 차곡차곡 모아둔 일기장들이 세월의 먼지를 이고 쌓여있다. 그림은 잘 그리지 못하고 그리기를 좋아하지도 않아서 그림 일기장에도 빼곡하게 글만 썼다. 결국 글 밖에 다른 무엇으로도 나를 표현할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살게 되리라는 전조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어린 나는 몸과 마음이 자주 아팠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은 일에 쫓겨 허둥지둥 바빴고 집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뛰놀기보다는 찬 방바닥에 배를 깔고 혼자 놀기에 익숙했다. 외톨이에게 대단한 하루 일과가 있을 리 없었다. 매일 매일이 닮은꼴로 느리게 흘러갔다. 그래서 쓸 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항상 쓸 거리를 만들어냈다. 기분이 나쁘다고 썼다. 엄마 때문에, 동생 때문에, 무언가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썼다. 억울하고 슬프고 우울해서 기분 좋은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고 썼다. 내 일기장의 제목은 ‘기분 일기장’이었다. 상처 받은 아이의 일기장은 감정의 요철로 울퉁불퉁했다.

사춘기 때는 열쇠로 잠그는 일기장이 유행했다. 별다른 비밀도 없는 글을 끄적거릴 때마다 비밀처럼 꼭꼭 숨겼다. 대학에 와서도 계속 일기를 썼다. 예전만큼 매일 강박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머리맡에는 언제나 호흡의 기록 같은 일기장이 있었다. 그때는 글이 쓰고 싶다고 글을 썼다. 언젠가 글만 쓰며 살고 싶다고 글을 썼다.

작가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부터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 창작은 내가 가진 모든 생각과 에너지를 요구했고, 시나브로 일기에 토로할 기분이나 숨겨둘 비밀이 사라졌다. 상처와 그 상처의 흔적도 조금씩 희미해졌다. 바야흐로 문학으로 구원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통제되고 억압되었던 충동과 욕구가 사회적 정신적 가치인 예술 창작을 통해 승화(昇華)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별다른 창작수업이나 습작의 과정을 밟지 않은 내게는 일기 쓰기가 수업이자 연습이었다. 밤마다 내가 살아낸 하루를 돌이키는 일은 아미엘의 표현처럼 독백의 기도이자 내 안의 신과 나누는 대화였다. 일기를 쓰며 나는 나 자신을 다시 만났다. 약하고 어리석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하고 화해하게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세상을 향해 첫걸음을 뗄 용기가 났다.

대단하고 특별한 일로 생각할수록 글쓰기는 어려워진다. 머리맡에 노트와 펜이 있고 내가 너무 잘 아는 주인공인 내가 있다. 이제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 살아낸 만큼 쓰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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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고독한 위안이자 치유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김별아(소설가) 생산일 2016-01-29
관리번호 D0000041753631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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