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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에서 '대한제국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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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에서 황궁우로 가는 황제의 계단에서 기념촬영을 한 답사단 ⓒ최용수

환구단에서 황궁우로 가는 황제의 계단에서 기념촬영을 한 답사단

‘대한제국(大韓帝國)’, 반만년 역사 중에 유일하게 황제를 모시며 살았던 우리의 나라 이름이다. 아관파천에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丘壇)에서 천제를 올리는 의례로 황제에 즉위했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의 체결로 한반도에서 국제세력이 힘의 균형을 이루자 자주독립국을 선포한 것이다. 이후 국치일인 1910년 8월 29일까지 대한제국의 13년, 그 이야기를 정동길에서 되짚어봤다.

지난 21일 오후 3시, ‘310인 시민위원회’ 위원 60여 명이 ‘환구단’에 모였다. ‘3.1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 100주년 기념사업’의 마지막 답사 코스로 선정된 ‘대한제국의 길’을 걷기 위해서이다. 국권 회복과 국민국가를 태동시킨 제국의 역사를 상기하고 재조명하기 위한 답사였다. 안내와 그날의 이야기는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총감독(서해성)이 스토리텔링 해 주었다.

답사의 시작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에서 시작되었다. 이어 근대국가로의 꿈과 희망이 담겼던 ‘덕수궁’, 매국적인 협정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중명전’, 대한제국 중립외교의 거점이었던 ‘손탁호텔(Sontag Hotel)’ 그리고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장소 ‘구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지는 총 2.6km 구간으로 구성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120년이 흐른 오늘날 옛 역사의 흔적에서 ‘대한제국의 이야기’를 더듬어보았다.

팔각형 황궁구를 둘러보는 답사단 ⓒ최용수

팔각형 황궁우를 둘러보는 답사단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

환구단((?丘壇, 사적 제157호)은 역대 왕조에서 유교적인 의례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祭天壇)이었다. 고려 성종 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제도화했으나, 고려 말 배원친명(排元親明) 정책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조선 세조 때 몇 차례 거행된 바 있으나 본격적인 제사는 1897년 환구단을 건립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배를 강화하려던 일제는 1913년 대한제국 정통성의 상징인 환구단을 철거하고 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당시 신위를 봉안하던 팔각의 황궁우(皇穹宇, 환구단 부속건물)와 황제의 상징인 용 문양을 새긴 계단뿐이다. 또한, 그 앞쪽에는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세운 석고(石鼓, 돌 북)가 있다. 고종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여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환구단을 허물고 호텔로 덮어버린 일제의 계략과 지금은 한 호텔의 정원 장식용처럼 남아 있는 환구단의 흔적이 안타까움을 더했다.

고종이 살았던 덕수궁(옛 경운궁) 중화문 모습 ⓒ최용수

고종이 살았던 덕수궁(옛 경운궁) 중화문 모습

국호를 ‘대한’으로 반포한 곳 ‘경운궁(덕수궁)’

경운궁(慶運宮, 훗날 덕수궁, 사적 제124호)은 본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으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몽진(蒙塵, 긴급피난)하였다가 돌아온 선조가 임시 기거하면서 행궁(行宮, 임시별궁)으로 삼았다. 그 후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면서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1년 창덕궁을 중건한 후 옮겨가면서부터 ‘경운궁(慶運宮)’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종은 1897년 2월부터 1907년 황제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당시 경운궁이 있는 정동 일대는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들의 주 무대였다.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이곳에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연호(年號)는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한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출범과 더불어 격동기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운궁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중명전` 모습 ⓒ최용수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중명전` 모습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중명전’

중명전(重?殿, 서울시 유형문화재 53호)은 1897년 고종의 환궁을 위한 경운궁(현 덕수궁) 확장 공사를 하면서 궁궐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A.J. Sabatin)가 맡았고, 황실도서관(Imperial Library) 용도로 1899년경 준공되었다.

이곳 중명전은 1905년 11월 불법적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고, 1907년 4월 20일 이상설 등 3인의 특사를 헤이그로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중명전이 위치한 정동 일대는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 1912년경부터는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외국인구락부)으로 사용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민간인 소유의 서울클럽으로 사용되다가 2006년 문화재청이 인수하였다. 이후 옛 모습으로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지금은 대한제국 역사교육장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은 역사의 슬픔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모습을 재현한 중명전 내부 전시실 ⓒ최용수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모습을 재현한 중명전 내부 전시실

최초의 서양식 호텔 ‘손탁호텔’

손탁호텔은 근대화 시기 마땅한 숙박시설이 없던 1902년, 독일 여성 손탁(Sontag, 孫鐸)이 건립한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아관파천 이후 손탁(Miss Sontag)은 고종황제의 신망을 받아 밀사의 역할을 많이 하여 숱한 비화를 낳았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제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헐버트와 베델의 주 활동 처였고,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伊藤博文)가 숙소로 사용하면서 ‘을사늑약’ 체결을 압박했던 공작 장소이기도 했다.

1918년 문을 닫은 뒤에는 이화학당의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1923년 호텔을 헐고 새 건물을 지었으나 6·25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지금은 정동교회에서 경향신문사 쪽으로 올라가는 곳에 호텔의 터였다는 표석만 남아 있다. 19세기 외세의 흐름에 따라 일진일퇴했던 여러 정치세력의 집합소이자 본거지로 사용되던 호텔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아쉬웠다.

구 러시아공사관 자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탑의 모습 (뒤쪽) ⓒ최용수

구 러시아공사관 자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탑의 모습 (뒤쪽)

고종의 아관파천 장소, 구 러시아 공사관 탑

정동 예원학교 옆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면 이국풍의 우뚝 선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 건물들과는 그 형태가 남달라 눈에 확 띄는 르네상스풍의 건물이 바로 옛 러시아(아라사) 공사관의 탑(사적 제253호, 아라사 俄羅斯)이다. 고종 27년(1890)에 준공된 러시아 공사관은 현재 이 탑 외에는 빈터만이 남아 있고, 주변 지역은 시민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지금은 주변 높은 빌딩들로 인해 왜소해 보이나 당시에는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건물이었다. 일본을 견제하려는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이듬해 2월까지 머물렀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러시아 공사관이다. 특히 궁궐을 비롯한 도성 안을 동서남북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지형적 이점을 이용하려는 러시아의 정략적 계산에 놀라움을 느꼈다. 구 러시아 공사관 자리에 올라서니 격변기 나라의 주권을 상실해가던 힘없는 대한제국의 모습이 떠오르며 회한의 장소로 다가왔다.

“가슴 아픈 역사일수록 디테일하게 기억해야 감정적 대응을 하지 않는다. 오늘 답사한 ‘대한제국의 길’은 결코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버린다면 식민지배가 당연했음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라는 서해성 총감독의 이야기는 어떻게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추진된 ‘100년 답사’ 마지막 행사는 아픔의 역사도 기억해야 하는 그 까닭을 깨닫게 해준 뜻 깊은 시간이었다.

문의 : 3·1운동 100년, 대한민국 100년 사업 사이트 (www.seoul100.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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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에서 '대한제국의 길’을 걷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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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시민기자 최용수 생산일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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