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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서 되새기는 3·1운동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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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빌딩 정문 앞에 세워진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방주희

태화빌딩 정문 앞에 세워진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

태화빌딩이 위치한 종로구 인사동 5길 29번지를 찾았다. 인사동 한복판을 걷는 길이 낯설기도 하면서 설렜다. 태화빌딩의 자리는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 우리 민족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이 있던 곳이다. 태화관은 당시 음식집이었는데, 지금은 지하 3층과 지상 12층의 건물이 들어섰다. 현재 태학기독교사회복지관의 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신식 건물만 놓고 본다면, 이곳에서 독립만세를 제창하기까지의 긴박했던 순간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건물의 정문 앞쪽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표지석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 ‘기미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다. 표지석을 보지 않았다면, 도심 속에 있는 태화빌딩이 역사 속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과 `기미독립선언문`이 새겨진 벽ⓒ방주희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과 `기미독립선언문`이 새겨진 벽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까지의 과정은 어떠했을까. 33인의 민족 대표단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돼 독립운동을 준비해 왔다.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거사일을 3월 1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2월 초 최린,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등 여러 독립투사들은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하되 손병희가 제시한 원칙에 충실하도록 협의했다. 최남선이 작성한 ‘3·1 선언서’는 천도교 지도자의 주관 하에 작성된 것으로써 밖으로는 ‘인도주의’를 표방하며, 특히 제국주의인 일본 정부와 협의해 독립을 달성하려는 독립 청원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공약 3장(公約三章)’을 첨가함으로써 독립선언서로서의 외형을 갖췄다. 조선 독립의 선언과 민족적 결의 촉구라는 주제로 쓰인 논설문이자 실용문이다.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사에서 이종일의 책임 아래 선언서 2만여 장을 인쇄해, 2월 28일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배포했다. 독립선언서는 3·1운동의 정신적 지침이 되었고, 전 세계로 전파돼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는 계기가 됐다.

`기미독립선언문`이 새겨진 벽(좌), `기미독립선언문`을 읽고 있는 한 시민의 모습(우)ⓒ방주희

`기미독립선언문`이 새겨진 벽(좌), `기미독립선언문`을 읽고 있는 한 시민의 모습(우)

그렇다면 태화관이 어떻게 독립운동의 점화지가 될 수 있었던 걸까? 1919년 3월 1일, 약 5,000명에 이르는 시민과 학생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탑골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 대표 일동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했다. 동시에 미리 서명해둔 ‘독립선언서’를 한용운이 발표했고, 급히 달려온 일경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일제히 사로잡혔다.

민족 대표들은 원래 탑골공원의 군중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예정됐던 탑골공원에서의 시위 계획을 변동했다. 민중이 흥분해 폭력 사태가 일어날 경우 독립을 청원하려는 자신들의 뜻이 훼손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인사동에 있는 음식점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겨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 삼창을 외친 후 조선 총독부에 연락해 자진 체포됐다.

3·1운동의 점화지로 알려진 탑골공원의 정문 삼일문ⓒ방주희

3·1운동의 점화지로 알려진 탑골공원의 정문 삼일문

‘우리 조선은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권동진, 이갑성, 박희도, 최성모, 길선주, 권병덕, 이명룡, 박동완, 최린, 이필주, 나용환, 이승훈, 신홍식, 한용운, 백용성, 나인협, 이종훈, 신석구, 홍병기, 김완규, 양전백, 이종일, 오세창, 홍기조, 김병조, 양한묵, 임예환, 오화영, 김창준, 유여대, 박준승, 정춘수.

시민 모두가 자랑스러운 민족 대표의 후손이자, 대한독립을 열망한 34번째 민족 대표라고 생각한다. 98년 전 외쳤던 독립의 뜻을 기리기 위해 다가오는 3.1절에는 시민들의 발길이 태화관 터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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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시민기자 방주희 생산일 2017-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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