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울] 서점은 공항이고, 먼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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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미 본 것도 다시 주목하는 일상의 발명

Voyage autour de ma chambre.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은 1796년에 발간된 책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공상을 즐겼다. 그림과 미술,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과학에도 빠져들었다. 호기심이 모험심을 불러왔다. 방 안에 홀로 있던 소년은 성장해 먼 나라로 원정을 나가는 군인이 되었다.

27세 때 토리노에 파견된 그자비에는 군법을 위반했다. 불의를 참지 못해 장교와 결투를 벌인 것이다. 42일간 가택연금이 내려졌다. 하필이면 사육제 기간이었다. 길은 즐거운 사람들로 가득한데 그는 집을 나갈 수 없었다. 갇혀 지내는 동안 그자비에는 공상을 즐기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방을 여행했다. 소파는 마차가 되었고, 초상화 속 여인은 친구가 되었다. 집 안 물건들의 역사를 상상했고, 스쳐 지났던 책을 다시 읽었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달 반 동안 집 안을 여행한 그자비에의 기록은 마르셀 프루스트부터 알랭 드 보통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일상의 발명가’라 불리는 알랭드 보통은 히드로 공항에서 보낸 일주일의 경험과 깨달음을 담은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라는 책에서 “여행의 즐거움이란 목적지보다 여행하는 심리에 좌우된다. 그자비에는 우리에게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을 다시 주목해보라고 옆구리를 찌른다”고 말했다.

2020년 한국에서도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잇는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공항에서 일주일을>과도 닿아 있다. <나와 당신의 작은 공항>의 저자 안바다는 매일 자신이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 음악과 미술과 책 사이를 여행한다. 식물을 키우며 자연을 만나고, 베란다에 몸에 잘 맞는 1인용 소파를 들여놓고는 노을이 지는 모습을 오래 바라본다. 작가는 현관을 공항이라 불렀다. 떠나고 돌아오는 곳이며,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책장 위를 여행한다

문 밖을 떠돌고 싶지만, 문 안을 여행하는 날이 길어지고 있다. 지난 1년은 서점 주인에겐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판매량이 30% 이상 늘었다. 금요일 퇴근길, 서점에 들러 주말에 읽을 책을 고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힙’하다는 음성 기반 SNS 클럽하우스에 들어가 보니 ‘사놓고 안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방이 열려 있다. 고전부터 신간까지 사랑받고 있다. 부지런히 책 읽고 소개하느라 서점 주인은 지루한 줄 모른 채 코로나19의 나날을 통과하고 있다. 하나를 펼치면 지중해가 출렁이고, 또 하나를 펼치면 오로라가 드리운다. 서가를 따라 걸으면 여기서는 파두(Fado)가 울리고, 저기서는 코끼리가 땅을 딛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원 서적을 모아둔 곳에선 흙냄새와 풀 향기가 나고, 오디오장 아래에는 고뇌하는 음악인이 있다. 전 세계는 물론 우주가 내 손끝에 있다.

지난주에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중고 서점에 이틀을 머물렀다. 찰스 디킨스의 저자 사인본이 있고, 벽난로 앞에는 고양이가 자고 있는 서점이다. 방이 여럿이던 건물인데, 문을 떼고 방마다 섹션을 나눠놓았다. 1인용 소파에 앉아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원 니키는 한낮이 되어서야 출근했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얼굴이다. 주인은 페이스북을 열고 “오늘도 니키는 어김없이 지각했다”고 적는다. 드문드문 손님이 찾아와 다양한 방법으로 서점 주인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서점 주인은 또 페이스북을 열고 얼마나 괴상한 손님이 얼마나 창의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분노하게 했는지를 적는다. 잠시 후 문제의 손님이 다시 찾아와 페이스북에 또 한 번 이상한 글을 올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서점 주인을 협박한다. 그가 가고나면 서점 주인은 페이스북을 열고 자판을 투닥거린다. “이러니 내가 까칠해질 수밖에 없다. 서점 전에는 상냥하고 부드러웠건만”이라고 적는 동안 이웃 주민이 갓 구운 쿠키를 들고 온다. 달콤한 냄새가 공기 중에 퍼진다.

숀 비텔의 <서점 일기>를 읽었다는 말이다. 젠 캠벨의 <북숍 스토리> 옆에 꽂아두었다. <북숍 스토리>를 열면 전 세계 서점을 여행할 수 있다. 에든버러라고 했던가, 작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 작은 서점에선 ‘솔직히 책 팔러 왔어요’라는 행사가 매년 열린단다. 저자들이 자기 책을 들고 나와 직접 판매하는데, 크리스마스 마켓처럼 붐빈다고 한다.

서울사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포르투갈 여행이 가능한 ‘서점, 리스본’ 내부.

비행기 대신 독서 의자, 공항 대신 서점

내가 사는 연남동을 떠올린다. 검색 결과 2008년 기준으로 연남동 면적 0.65㎢, 인구는 1만9763명인데 ‘연남동서점’을 넣으면 열세 곳이 뜬다. 동교동, 서교동, 연희동, 망원동까지 모두 하면 몇 배가 된다. 이 지역 작가와 서점을 모아 ‘솔직히 책 팔러 왔어요’ 행사를 열면 어떨까. 경의선숲길공원이 가득 차고, 책을 구경하며 걸으면 지중해 바다와 아프리카의 밀림과 극지방의 오로라와 빙하가 내 곁에 있겠다. 책들이 쉬지 않고 말을 건네오니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은 책이 가득한 공간에 머무는 시간을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 표현했다. 16세기 셰익스피어의 영국식 영어부터 오래된 미래를 살고 있는 인도 라다크 사람들의 목소리, 1930년대 경성 예술가들의 대화까지 책 읽는 사람은 들을 수 있다.

몸에 맞는 의자 하나만 있으면 전용기가 따로 없다. 전 세계는 물론 우주까지도 온종일 여행할 수 있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면 20분쯤 뚜벅뚜벅 걸어 동네 서점을 찾아가도 좋겠다. 서울도서관 사이트에는 600개나 되는 동네서점이 지도 위에 잘 정리되어 있다. 마포와 종로는 서점이 많아 빈틈이 없을 정도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낯선 언어와 세상의 소리가 가득하니 책방이 곧 공항이고, 먼 나라다. 그러니 여행을 떠나 듯 오늘도 책방에 간다. 여행이 그리워서 더 즐겁게 책방에 간다.

정현주

정현주
20여 년 동안 라디오 작가로 활동했으며, 서점 ‘리스본’과 ‘포르투’의 주인장이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담은 에세이 <그래도, 사랑>, <다시, 사랑>, <거기, 우리가 있었다>,
<스타카토 라디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그리고 공저 <픽스 유>가 있다.

글·사진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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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D0000042270142 등록일 2021-04-14
분류 기타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21-04-01
라이선스 CC BY-NC-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