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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활사] 호떡집에 불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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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도 호떡을 설명했다. “호떡이란 중국 사람이 만든 밀가루 떡이다. 모양은 둥글납작하고
그 속에는 거무스름한 설탕을 살짝 발라가지고 누릇누릇하게 구워놓은 가장 값이 헐한 요리품인데 5전이다.”
서울에 유학 온 지방 학생들이 방학 때 선물로 가져가는 것 가운데 호떡이 빠지지 않았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호떡집에 학생과 해진 옷을 입은 사람이 앉아서 호떡을 먹고 있다. (조선일보, 1940년 5월 26일)


호떡 먹는 아이 앞에서 가난한 집 아이가 “아버지 돈 벌 때까지 자기는 헝거 스트라이크(기아 투쟁) 하겠다”고 말한다. (<제일선>, 1932년 5월호)


호떡 사 들고 오는 여인이 아는 사람을 만나 당황한다. (매일신보, 1934년 11월 19일)

서울 떡과 오랑캐 떡

곡식 가루를 찌거나 삶아 익힌 것이 떡이다. 쫄깃하고 달아 서 밥보다 떡을 더 챙기는 ‘떡보’도 있다. 일제강점기의 한 잡지는 서울 떡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봄에는 쑥송편· 개피떡·송기떡·빈대떡이고, 4월 8일에는 느티떡, 5월 단오에는 취떡, 6~7월에는 증편과 깨인절미, 8월 추석에는 송편, 겨울에는 온갖 시루떡과 두텁떡 등이 유명했다. 서울 떡 가운데 색절편은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찬란한 떡이다.” 알 듯 모를 듯 한 떡이 많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서울에 호떡 바람이 불었다. 특히 겨울 호떡이 인기가 치솟았다. 어떤 이가 적었다. “밤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호떡을 두어 개 사서 신문지에 싸가지고 돌아와 이불 속에서 먹는 것은 별미다.” ‘호(胡)’라고 하면 오랑캐를 뜻하며 중국을 나쁘게 부른 말이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시골에는 호떡이 없었다. 읍내에 가면 풀빵·국화빵·붕어빵 등이 있었지만, 호떡은 서울로 전학 와서야 먹어볼 수 있었다. 하물며 일제강점기에야 더 말할 나위 없다. 호떡은 중국인이 사는 곳에서부터 퍼져나갔다. “호떡집에 불났다”는 말이 있을 만큼 호떡이 인기를 끌었다. 호떡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설탕 넣고 구운 것과 찐 것, 팥 넣고 구운 것과 찐 것, 아무것도 안 넣고 찐 것 등. 사람들은 흔히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을 낮잡아 부를 때 ‘호떡 장사하는 중국인’, ‘빙수 가게 하는 일본 사람’이라고 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호떡집. 호떡집 주인을 좋지 않은 이미지로 그렸다. (동아일보, 1936년 3월 25일)


화교 또는 장궤

다른 나라에 사는 중국인을 일컬어 화교(華僑)라고 한다. 화교는 중화(中華)의 ‘화(華)’와 객지 생활 또는 임시 거주를 뜻하는 ‘교(僑)’를 합친 말이다. 중국에서 재외 중국인 정책이 필요해서 1883년에 화교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고도 하고, 1898년 일본 요코하마에 살던 중국 상인이 자녀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학교 이름을 ‘화교학교’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사실이야 어떻든 화교의 기원 을 따지자면 멀리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그들 이 집단을 이루어 이 땅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부터다. 그 뒤부터 들어온 중국인은 ‘비 단 장수 왕 서방’처럼 상업을 하거나 농사를 짓고, 음식점과 이발소를 차리거나 쿨리[苦力]가 되었다. ‘쿨리’는 본디 인도 어 ‘kul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날품팔이라는 뜻이다. 이 쿨리라는 말이 음역되어 ‘고력(苦力)’이 되었다. 가난한 쿨리가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호떡이다. 중국인 음식업 가운데 ‘청요릿집’도 있었지만, 대부분 호떡집을 했다. 호떡집 주인은 돈을 모아 언젠가는 2층 벽돌집에 중국 음식점을 차리는 것이 꿈이었다. 사람들은 호떡집 주인을 ‘장궤’라고 불렀다. 장궤란 중국어로 ‘가게 주인’이라는 뜻이다. 뒷날 장궤가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인 ‘짱깨’가 되었다.


호떡집 창문 너머로 2층 중화요릿집에서 여인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동아일보, 1931년 1월 15일)

예사롭지 않은 호떡

호떡집은 하류 계급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날품팔이 노동자는 잘해야 하루 50~60전의 돈을 받았으니 5전짜리 호떡도 마음껏 먹기 힘들었다. “막걸리 한 잔에 지게를 지고, 호떡 한 개로 빨래품을 판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아침에 호떡 두 개로 끼니를 잇고 점심때 국밥집에 가서 15전~20전짜리 국밥 한 그릇을 먹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값 싸고 배부른 호떡을 즐겨 먹는 ‘호떡인’은 돈 없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호떡은 학생 요리이기도 했다. 군것질로 남학생은 호떡, 여학생은 군고구마를 즐겨 먹었 다. 남학생은 점심시간이면 몇십 명씩 무리 지어 호떡집으로 갔다. 그들은 호떡집을 단골로 정해놓고 무슨 호텔, 무슨 호텔 하며 날마다 다녔다. 시래깃국 아니면 두붓국이나 먹는 기숙사 학생에게 호떡은 더없는 은인이었다. 학생만 군것질하라는 법은 없다. 호떡은 점심에는 점심 추렴, 밤에 는 밤참 추렴, 길 가다가 시장할 때 어느 때고 값싸고 간단 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군것질감이다. 육당 최남선도 호떡을 즐겨 먹었다. 중국인만 호떡을 판 것은 아니었다. 길가에서 호떡을 구워 파는 조선 사람이 생겨났다. 가난한 여인네들이다. 학생과 노동자가 호떡집을 자주 이용하는 것을 눈여겨보던 노동 운동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예 호떡집을 만들어 학생, 노동자와 접촉하고 독립운동의 발판을 만들려고도 했다. 중국인 호떡집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바람을 탔다. 전쟁이 터지면서 많은 중국인이 조선을 떠났다. 그러자 우동, 탕수육, 잡채는 그만두고 그렇게 흔하고 천하던 호떡조차 맛 보기 힘들게 되었다. 긴 전쟁 끝에 쌀이 귀해지자 길가에서 호떡을 파는 조선 사람이 늘어나는가 싶더니 호떡이 아기 주먹만큼 작아졌다. 전쟁 막바지에는 밀가루와 설탕을 구하기 힘들어 아예 호떡이 자취를 감추었다. 내 호떡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 밖에도 호떡에는 고향을 등지고 떠난 고단한 중국인의 삶, 중국인을 무시하고 배격하는 속 좁은 조선인, 전쟁 속의 음식 문화 등 훨씬 더 많고 묵직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래서 영웅호걸만이 아닌 호떡도 역사가 된다.


글 최규진(청암대학교 연구교수)

최규진 연구교수는 청암대학교에서 한국 근현대 일상생활사를 연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 <쟁점 한국사–근대편>, <제국의 권력과 식민의 지식>, <일제의 식민교육과 학생의 나날들> 등 다양한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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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9-01-10
관리번호 D0000035348158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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