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만나는 인문학] 민족의 성산(聖山) 남산과 남촌 역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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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허파인 남산이 자연ㆍ문화ㆍ역사 공간으로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남산 예장자락 재생, 남산 애니타운, 남산 역사 탐방로,
남촌 재생 플랜 등으로 남산 일대가 새롭게 단장될 예정이다.
그 중심에 남촌이 있다.

조선 정조 때 남산골에 살던 가난한 선비 허생이 있었다. 10년 계획을 잡고 공부를 하던 중 부인의 타박에 못 이겨 장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한양에서 제일 부자라는 변 씨를 찾아가 1만 냥을 빌린다. 허생은 그 돈으로 과일과 말총을 사서 장사를 시작해 큰돈을 벌고 변 씨에게 이자를 붙여 돈을 갚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변 씨가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돈을 빌려준 것은 “그는 옷과 신발이 누추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시선은 오만하며,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로 보아 재물에 욕심이 없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점 때문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실린 한문 소설 <허생전> 얘기다.
허생처럼 남산 기슭에 살던 가난하지만 기개가 높았던 선비를 가리켜 ‘남산골 샌님’이라고 불렀다. 북촌에는 주로 권세가들이 살았고, 남촌에는 과거에 합격했지만 보직을 얻지 못한 생원이나 진사, 몰락한 남인 계열의 선비가 살았다. 이들은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학문이 높고 어질었으나 생활은 넉넉하지 못한 편이었다. 김홍도의 스승 표암 강세황, 유성룡, 이순신, 원균, 허균, 정약용 등이 남촌에 살던 대표적 인물이다.

국가의 수호 산에서 시민의 휴식처, 관광 명소로

남산을 조선 시대에는 목멱산, 순우리말로는 마뫼라 불렀다. ‘남쪽의 산’이라는 뜻이다. 남산은 풍수지리와 유교 이념에 따라 건설한 수도 한양의 내사산 중 하나로,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복을 구하는 국가의 수호 산이었다. 태조는 목멱 신사를 짓고, 도읍을 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무학대사가 입적한 후 국사당을 세워 무학대사를 모셨다. 그리고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제사를 국사당에서 지냈다. 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수의 최종 집결지가 남산에 있었다. 5개의 봉수대는 갑오경장 다음 해까지 약 500년간 사용했다. 풍류를 즐기려는 백성들도 남산을 찾았다. 문인 사대부는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으며, 백성은 꽃놀이와 물놀이, 단풍놀이 등을 즐겨 했다.
 그러나 한양이 경성이 되고 경성이 서울로 바뀌는 동안 남산은 제 모습과 본래 기능을 잃어갔다. 일제는 조선왕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국사당을 없애고, ‘조선신궁(구 남산식물원 자리)’을 세웠다. 한국통감부, 노기신사, 경성신사 등을 지금의 예장동과 회현동 등에 세워 조선의 혼을 말살하려고 했다.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다. 광복 후에도 남산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5·16 군사정변 전까지는 좌·우익의 대립 무대가 되기도 했고, 군사정변 이후에는 국민 교육장으로 재편되었다. 거대한 반공 교육장 ‘자유센터’가 들어섰고, 중앙정보부와 수도방위사령부가 자리 잡았다.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고, 서울은 회색 콘크리트로 뒤덮였다. 그나마 남산은 콘크리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푸른 섬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발로 인한 환경오염, 기후변화가 세계적 이슈로 떠오르자 우리나라도 자연 회복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남산도 ‘자연’, ‘문화’, ‘역사’ 공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옥을 이전해 조성한 남산골한옥마을, 만화의 세계 속으로 풍덩 빠질 수 있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 N서울타워를 기점으로 남산을 한 바퀴 도는 남산둘레길, 철거한 한남동 외인 주택터에 조성한 남산 야외 식물원, 목멱산 봉수대를 복원한 봉수대 등 전통·문화·예술·자연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그리고 계절별로 다양한 행사를 개최해 서울시민의 휴식과 놀이 공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또 2012년 서울시 설문 조사에서 외국인 선정 서울 명소 1위이자, 2016년 기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서울 명소 BEST 5에 뽑히기도 했다. 이만하면 세계적인 명소라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서울의 다양한 한옥을 구경할 수 있는 남산골한옥마을

조선 시대 12정승을 배출했다는 마을의 보호수인 500살 된 회현 은행나무

북촌과 서촌에 비해 소외된 남촌의 부활

다시 남촌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남촌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거주지로 변했다. 1930년대 중반 서울 인구 중 25%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남촌 혼마치(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현재의 남대문로에서 태평로·회현동·을지로·명동 등이 일본인의 공간이었다. 남촌은 일본인이 세운 미쓰코시 백화점 등 근대적 상가가 집중적으로 들어선 경성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남촌은 국가 차원의 브랜드로 진화한 북촌에 비해 남산, 명동, 남대문시장 같은 주요 명소에 접해있으면서도 20세기 초반의 옛 서울 모습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회현동 일대는 좁은 골목길에 50년 이상 된 낡은 주택과 일본식 가옥이 곳곳에 남아 있는 낙후한 마을이 됐다.
1970년에 지은 회현 제2시민아파트 역시 역사의 산물.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제1세대 아파트로, 중앙난방식에 겨울엔 뜨거운 물도 나오는 초호화 아파트였다고 한다. 당시 입주금은 30만 원. 쌀 한 가마니가 5,000원, 연탄 한 장이 16원, 담배 한 갑이 60원 할 시기였으니 서민한테는 엄청 큰 금액이었다.
회현동에서 나고 자란 김윤숙(45세) 씨는 “태어났을 때나 지금이나 별반 변한 것이 없다”며 “동네로 들어오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중구청에서는 근현대 자원을 바탕으로 ‘회현동 남산옛길’을 조성하는 등 마을 재생에 힘쓰고 있다. 서울 곳곳에서 도시 재생이 활발한 서울시도 ‘남촌재생 플랜’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500년 역사의 회현 은행나무, 단원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의 집터, 서울의 마지막 시민 아파트인 회현 제2시민아파트, 근현대 건축자산 밀집지역, 소파로 아래 남산공원 등 회현동의 숨은 명소를 ‘5대 거점’으로 재생하고, 남촌의 옛 길을 촘촘히 되살려 서울로7017부터 남산까지 연결하는 보행 네트워크를 완성하는 것이 큰 그림이다. 남촌 역시 북촌과 서촌처럼 문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명소로 탈바꿈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남산이라는 프리미엄이 더해져 자연까지 즐길 수 있는 서울시 최고 명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회현동에는 아직도 일본인 적산 가옥이 남아 있다.

1970년에 지은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제1세대 아파트다.

이정은 사진홍하얀 일러스트레이터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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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D0000031845928 등록일 2017-11-07
분류 기타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7-11-01
라이선스 CC BY-NC-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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