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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만나는 인문학] 알고 보면 재미있고 쓸모 많은 한강 잡학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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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을 겪으며

유유히 흐르는 한강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그중 누구나 다 아는 얘기 말고, 처음 듣지만 재미있고 쓸모 많은 잡다한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1. 과연, 한강에는 괴물이 살고 있을까?

2006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한강이 배경이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한강 다리에서 괴생물체를 목격한 봉준호 감독은 2000년 미군 기지에서 독극물을 한강에 방류한 맥팔랜드 사건을 보고 영화를 기획했다고 한다. 영화 개봉 후 한강에서 진짜 괴물을 봤다는 목격담이 인터넷을 달구기도 했다. 실제로 1928년 약 2m 크기의 괴물이 한강에 나타났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는데…. 한강에는 과연 괴물이 있을까? 그건 네티즌 수사대에 맡기고 신문 기사와 옛 문헌에 나온 팩트를 소개한다.한강에 철갑상어와 돌고래가 출몰한다는 것. 한강에서 간간이 우리나라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가 사체로 발견되곤 한다. 서해에서 밀물 때 한강으로 들어왔다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해 죽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내왕했던 모양이다. 또 캐비아로 유명한 철갑상어도 1960년대까지 반포 인근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철갑상어는 중국과 북한, 우리나라 연안 또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 살며 알을 낳을 때는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회귀성 어종으로 멸종 위기 동물이다. 수질이 악화된 1980년대 이후 자취를 감췄는데, 만약 한강에 맑은 물이 계속 흘렀다면 캐비아를 지금의 날치알처럼 흔히 먹을 수 있었으려나?

2. 대수, 아리수, 열수, 경강, 한수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터전이 되어온 한강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에는 한반도의 중간 허리 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대수’라 불렀고, 고구려에서는 ‘아리수’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라고 했다. 고려 때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경강’ 혹은 ‘한수’라 불렀고, 그 이후 ‘한강’으로 고정되었다.

3. 물귀신이 아닌 얼음신(神)

과거 얼음은 소금과 더불어 중요한 자원이었다. 조선왕조에서도 겨울에 한강의 얼음을 잘라내어 저장해두었다가 한 여름에 이용하곤 했다. 조정에서는 빙고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를 별도로 배치했으며, 겨울에는 얼음신(神)에게 얼음이 두껍게 얼기를 기원하는 ‘사한제(司寒祭)’를 지내기도 했다. 빙고 제도는 1898년에 폐지되었으나, 해방 이후까지도 한겨울이 되면 한강에서 커다란 톱으로 얼음을 채취 하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4. 수탈과 침략의 물길

서울의 중심인 한강은 우리 민족 역사의 궤적이기도하다. 조선의 한양 천도 이유 중 하나가 한강이었다. 조세인 세곡을 운반하기가 육로보다 훨씬 쉬웠던 것. 전국의 세곡을 한강을 통해 운반했고, 생활에 필요한 온갖 물자를 한강을 통해 공급했다. 외세의 침략으로 조선왕조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한강은 슬픈 물길이 되었다. 프랑스 군함이 한강을 따라 한양 턱밑까지 쳐들어온 병인양요 이후 열강들이 무력 도발을 강행하는 통로가 된 것이다. 여기에 일제는 한술 더 떠 경제 수탈과 침략을 위해 수로의 기능을 최대한 이용했다. 1888년 최초로 증기선을 띄워 상권 확보에 나섰으며,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군용선으로 징발, 병력 이동과 군수품 수송에 이용했다. 한강에 놓인 최초의 다리인 한강철교(1900년)도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따낸 경인철도부설권을 일본이 인수해 완공시켰다. 이로써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놓인 경인철도가 한강철교에 의해 서울역까지 연결 되었고 수탈과 침략이 고속으로 진행되었다.

5. ‘빨갱이’ 때문에 건설한 제3한강교

제3한강교(한남대교)의 건설 목적은 강남 개발이 아니었다. 서울로 몰려든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강남 개발이 필요하긴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안보’였다. 당시 서울 시민은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제1한강교를 폭파해 꼼짝없이 갇혔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가설되기는 했지만 이 다리는 전쟁이 났을 때 군사작전용으로만 쓸 수 있었다. 서울 시민은 전쟁이 났을 때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필요했고, 그것이 1966년 1월에 착공한 제3한강교다. 당시 평양 대동강 다리보다 1m라도 더 넓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당시로선 과한 6차선으로 설계했다. 엎친 데 덮친격으로 1968년 북한 간첩 김신조가 내려와 총격전을 벌이면서 ‘빨갱이’ 불안감이 온 나라를 휩쓸자 서울 상류층은 강남으로 속속 이주했다. 강남은 이런 안보 위기감 속에서 급속하게 개발됐고, 한남동과 강남, 영동을 연결하면서 경부고속도로로 이어져 강남 신화의 초석이 되었다.

거대한 쓰레기 산에서 시민들의 휴식처로 거듭난 난지도

6. 쓰레기 산에서 쓴 월드컵 4강 신화

과거 난지도는 경치가 아름다워 데이트 장소와 영화 촬영지로 이용하던 명소였다. 그러나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 2개의 거대한 쓰레기 산이 되고 말았다. 쓰레기로 인한 침출수로 생태계는 파괴됐고 유해가스는 인근 지역을 뒤덮었다. 그러나 1993년 완전히 폐쇄한 후 생태 공원과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건설하면서 대변신했다.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이곳에서 쓴 것이다. 악취와 파리 떼가 들끓는 속에서 쓰레기를 줍던 넝마주이로 대변되는 쓰레기 산에서 난지도의 꿈은 이루어졌다.

여의도 개발을 위해 폭파된 밤섬이 원래 모습을 되찾고 있다.

7. 여의도에 희생당한 밤섬의 놀라운 부활

물 맑고 모래가 고운 한강은 예부터 서울 시민의 단골 휴식처였다. 여름에는 피서를 즐기기 위해 한강 인도교 밑 백사장과 뚝섬 광나루의 넓은 모래밭으로 사람이 모여 들었다. 겨울이면 꽁꽁 언 한강 인도교 밑으로 스케이트와 얼음썰매를 타는 인파가 몰렸으며, 1924년부터는 ‘전조선 빙상경기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개발과 더불어 더러운 강으로 추락해 오랫동안 시민에게 외면당했다. ‘오염의 상징’으로 쓸쓸히 흐르던 그 강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대표적 사례가 밤섬이다. 밤섬은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여의도 제방 축석에 필요한 잡석을 채취하기 위해 1968년 2월 폭파, 해체했다. 그런데 반세기 동안 남아 있던 암반층에 토사가 쌓이고 풀과 나무가 자라면서 원래 모습을 되찾고 있다. 숲이 우거지자 새가 날아들었고, 도심 내 물새 서식지로서 보전 가치를 인정받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기도 했다. 서울시는 자연으로 복귀하는 한강의 자연성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연형 호안, 천변 생태습지, 버드나무림, 편백나무 숲 등을 조성해 자연과 사람이 공존·공생하는 한강을 만들 계획이다. 최근 반포 한강공원에서는 꿩 한 쌍이 목격됐다. 새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한강의 기적이 아닐까.

이정은사진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국가기록원, 연합뉴스일러스트조성흠
참고 자료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원형백과, 한강 이야기 자료집(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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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7-08-02
관리번호 D0000030973976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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