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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평행이론] 서울과 로마의 주인이 바뀌는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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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울과 한강 유역을 노린 삼국 열전

2,000년 전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나라를 세운 후, 서울은 500년 가까이 백제의 수도였다. 서울을 수도로 삼은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다. 서울을 포함한 한강 유역은 한반도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한강의 풍부한 수량과 인근 평야는 농사에 적합했고, 한강 하구에서 중국과 이어지는 바닷길은 선진 문물을 유입하는 데 유리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구려의 고국원 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4세기 말에 이르면 백제의 전성기가 끝나고 한반도의 주도권은 고구려에 넘어가고 만다. 이 무렵 광개토대왕이 역사에 등장한다.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왕은 즉위하자마자 정복 사업에 나서 동북아시아 일대를 평정하고, 한강 이북에 있던 백제의 성들도 점령했다. 이후 한강을 건너 백제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나라를 멸망시키지는 않았기에 서울은 여전히 백제 땅으로 남아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시선이 한반도 남쪽보다는 북쪽을 향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아버지와 달랐다. 수도를 압록강 변의 국내성에서 남쪽의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를 본격적으로 공격했다. 마침내 475년, 장수왕은 서울을 점령했고 백제는 수도를 공주로 옮겼다. 493년간 백제 땅이던 서울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중국 로마

로마와 중국의 멸망, 한반도의 문명 교류

서울과 로마의 주인이 바뀔 무렵, 중국은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고 있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秦)의 뒤를 이은 한(漢)이 멸망한 뒤, 삼국시대를 거쳐 위-진-남북조를 잇는 혼란기가 거듭된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중국 쪽으로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이 분열하면서 힘이 약해진 덕분이었다. 장수왕이 한반도 남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도 중국에 북위라는 강력한 나라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반도와 중국은 서로 밀접하게 맞물리며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동안 로마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한반도로 이어지는 문명의 교류 또한 계속되었다. 고구려가 서울을 점령한 이듬해인 476년, 서울에서 약 1만km 떨어진 로마의 주인도 바뀌었다. 악티움해전 이후 서양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이 게르만 민족에게 멸망한 것이다(이때 서로마제국은 멸망했으나,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동로마제국은 이후 1,000년 넘게 번영했다). 로마의 멸망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의 성공에서 비롯한 측면이 크다. 대규모 정복으로 식민지의 값싼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자영 농민층이 몰락하고, 이들이 주축을 이루던 군대가 약해지면서 외국에서 들어온 게르만 용병이 로마를 무너뜨렸으니까. 서울의 주인이 바뀐 것이 외세의 침략에 의한 것이라면, 로마의 주인이 바뀐 것은 내부의 붕괴 탓인 셈이다.

글 구완회(작가) 일러스트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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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7-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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