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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문화유산 답사]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 배재학당 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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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은 선교사 아펜젤러가 기독교인 양성과 국가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1885년에 설립했다. 그 후 학생이 늘어나자 교사(校舍)를 증축했는데, 1916년에 준공한 배재학당 동관은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이 대체로 남아 있고, 건축미가 뛰어나 1910년대 한국 근대건축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현재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는 배재학당 동관은 원래 배재고보의 교실이었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H. G.아펜젤러가 세웠으며, 오늘날의 배재중학교와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1개월 먼저 와 있던 W. B. 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학생 2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 사학인 배재학당의 시초다. 배재학당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으로 기독교인 양성과 국가 인재 양성이 목적이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교육을 받은 사람을 배출하려는 것이다”라고 설립 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학당훈(學堂訓)을 내걸었다.
이에 고종은 1886년 6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이름 지어 간판을 써주었고, 그해 10월 학생은 20명으로 늘었다. 당대의 명필 정학교(丁學喬)에게 학교 간판을 쓰게 하고, 외무아문(外務衙門)의 김윤식(金允植)에게 이 간판을 하사하도록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고종이 배재학당에 관심이 매우 많았던 것 같다.


그 후 날로 늘어가는 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큰 교사가 필요했다. 아펜젤러는 미국인의 후원을 받아 1887년 교사를 착공해 같은 해 12월 벽돌조 1층, 연면적 약 330m2의 교사를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준르네상스 양식의 벽돌 건물로 지상층에 강당과 교실 4개, 도서실, 당직실이 있었으며 공업부 학생을 위한 지하실도 있었다. 학교용 시설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 건물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 건물은 배재고보 서관을 신축하면서 철거되었다.


최초의 르네상스풍 학교 건물
1887년 준공한 구 교사 건너편에 1916년 준공한 동관은 벽돌조 2층, 연면적 약 1천415m2 규모로 지하실과 다락방이 있었다.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이 대체로 남아 있고 건축미가 뛰어나 1910년대 한국 근대건축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1984년 배재고등학교가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교실로 사용했으며, 2008년 7월 24일 동관 건물을 새롭게 단장해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개장했다. 박물관은 상설전시관·기획전시관·체험교실·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설전시관에는 1930년대 배재학당의 교실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배재학당에서는 성경과 영어를 비롯해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근대 교육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교과목은 한문·영어·천문·지리·생리·수학·수공·성경 등이었고, 체육 시간에 서양 운동인 야구·축구·정구·농구 등도 가르쳤다. 또 특별활동 시간에는 연설회·토론회 등도 장려했다. 서재필, 이승만 등은 교내 변론회(辯論會)를 조직하고 시국 문제를 토론했는데, 마치 기성인들이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모습과도 같았다. 배재학당에서는 서재필, 이승만, 주시경, 나도향, 김소월 등 우리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글 이정은 사진 김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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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문화유산 답사]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 배재학당 동관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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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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