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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둘레길] 어머니의 큰 품 너머 뜻대로 흐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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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서울둘레길 4코스<1 > 대모·구룡산 구간(수서역~양재시민의 숲)


산은 어머니다. 봉우리 모양으로 만든 글자의 소리를 만물을 태어나게 한다는 산(産)으로부터 따온것도 그런 이유다. 그런 산을 지극히 ‘큰 어머니’라고 강조해 부르는 이름이 있다. 대모산(大母山), 강동과 송파를 지나온 서울둘레길은 강남구에 들어와서는 그 산자락 품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왼쪽) 대모산에서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은 줄곧 울창한 숲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오른쪽) 구룡산 골짜기와 청계산으로부터 온 물줄기가 합쳐져 양재천으로 흘러가는 여의천



왕릉을 품은 어머니의 산, 강남의 열기를 식히는 숲


3코스의 둘레길이 성내천에서 장지천 그리고 탄천까지 물길을 따라 유유자적 흘러왔다면 4코스는 수서역 에서부터 곧바로 산으로 들어간다. 수서는‘탄천의 물줄기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생긴 지명이다.


대모산은 산정으로 향하는 등산로 계단을 따라 처음부터 급하게 고도를 끌어올린다. 앞서 지나온 고덕산이나 일자산이 차마 산이라 부르기에 어색할 만큼 낮아 보였다면 대모산은 그 이름값만큼 다리품을 팔아야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대모산 정상은 표고 293m다. 둘레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4코스의 빨간 우체통에는 인자한 할머니 모양 스탬프가 기다리고 있다. 대모산이 원래 ‘할미산’ 으로도 불렸기 때문이다. 이 산 남쪽 기슭에 조선 태종과 그의 왕비 원경왕후의 헌릉이 들어선 다음부터 대모산으로 부르게 했다는 안내문이 둘레길 입구에 서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15년에 묫자리를 정할 때부터 이미‘광주 서쪽 대모산(大母山) 남쪽에 좋은 땅을 보아 얻었다.’고 적혀 있다. 대개 산 이름에는 여러 전설이 전해져 오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할미산이든 대모 산이든 어머니처럼 품이 안온하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오래도록 광주 땅이었던 대모산이 서울로 적을 옮기게 된 것은 한강 남쪽 한적한 농촌에 거대한 개발의 바람이 불면서부터다. 1963년 강남의 드넓은 땅들이 서울에 편입되면서 본래 논고개였던 논현동이나 한강변 갯벌이 있던 마을이란 뜻의 개포동의 풍경이 급변하기 시작할 때 말이다. 대모산은 이웃한 구룡산과 나란히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1988년 강남구에서 서초구를 분리할 때도 이 산줄기를 경계로 삼았다.



약수터에서 약수터로, 대모산에서 구룡산으로 길은 이어지고


산을 오르며 숨이 가쁜 것도 잠시, 이내 길은 숲 사이로 편안해진다. 대모산 둘레길은 산의 북쪽 기슭을 따라 가는데, 중간에 여러 차례 정상으로 향하는 갈림길과 만난다. 정상 너머는 서초구 내곡동이고 그곳에 태종의 헌릉과 함께 순조 부부의 인릉도 있다.이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두 부류다. 그중 두둑한 배낭에 알파인스틱까지 챙겨 가지고 본격적으로 등산을 하는 사람은 일부러 멀리서 찾아온 이들이다. 그들의 발길은 으레 정상을 향한다. 돌아갈 길이 머니 자연 걸음도 빠르다. 반면 편안한 옷차림에 빈손으로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걷는 이들은 한가롭다. 쟁골, 궁마을, 일원동 등 인근 마을에서 올라온 이들이다.


산 아래 동네 사람들이 오랫동안 애용했을 약수터 사이로 한동안 둘레길이 이어진다. 제일 먼저 만나는 약수터는 쌍봉약수터다. 이곳에서 실로암약수터를 지나 불국사 경내 약수터, 구룡산 개암약수터까지 길이 이어지는데 중간중간 또 다른 약수터로 향하는 갈림길들이 여럿 나타난다. 대모산 너른 가슴이 사람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인데도 유난히 많은 약수를 품었다. 그러나 달게 마시던 약수들이 예외없이 수질검사 결과‘음용 불가’가 되어 있어 마음은 허전하다. 새벽이면 가족을 위해 약수터를 찾던 늙은 아버지들은 아직 그 물맛을 기억할까.

왼쪽) 일원동 주민이 15년 동안 쌓아올렸다는 대모산의 돌탑. 돌탑 옆에 전망대가 있다. 오른쪽) 일원동불국사석불좌상이 모셔진 대모산 불국사 약사보전



돌탑전망대에서 불국사까지 기도는 끊이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 물맛도 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이 변화의 상징이라면 돌은 한결같은 마음을 담는다. 쌍봉약수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15년째 돌을 쌓아 탑을 세워놓은 돌탑전망대가 있다. 안내판에는 그곳의 돌탑들이 일원동 주민 임형모 씨 한 사람의 작품임을 알려 주고 있다. 켜켜이 탑으로 쌓아 올린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수십 억 년 이상 응축된 지각의 시간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돌탑보다 산 밖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전망대 난간에 기대 등 뒤로 펼쳐지는 장쾌한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청명한 날씨 덕에 멀리 북한산부터 도봉산, 수락산과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북쪽 울타리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봄부터 도봉산역에서 시계 방향으로 걸어온 둘레길 종주가 이제 절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멀리 있는 산들까지 한눈에 들어오니 넓게만 생각했던 서울이 좁게 느껴진다.


도심 안에 빼곡한 고층 빌딩들 사이 어느 곳 하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대모산 발아래는 이름난 마천루들의 각축장인‘강남’이다. 다시 산속으로 눈을 돌려 나무들 사이로 걷는다. 이 금싸라기 땅에 산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어느 때보다 고맙게 느껴진다. 왕릉을 모신 덕에 더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을까. 숲 구석 구석 어른이 양팔을 다 벌려도 모자라는 둘레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산지기처럼 서 있는 것도 반갑다. 숲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참나무다. 둘레길 정비에 쓰인 목재도 숲에서 간벌한 참나무들이 많은데, 나무토막 위에는 저절로 자라난 버섯들이 꽃처럼 피어 있다. 버섯은 자라면서 차츰 나무를 분해해 흙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솔 이끼와 고사리 잎을 이불처럼 덮은 가을 숲 구석구석에는 참나무가 뿌려 놓은 도토리들이 흩어져 있다. 이 숲은 죽은 참나무들의 살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세워졌다는 불국사에 다다르니 요즘절마다 한창인 수능백일기도 현수막이 먼저 눈에 띈다. 이 절에는 대웅전 대신 약사불을 모신 약사보전이 전설에 따르면 인근 마을의 농부가 밭을 갈다 땅속에 묻혀 있던 돌부처를 발견한 자리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돌로 만든 불상에 두껍게 호분이 칠해져 있는데, 일원동불국사석불좌상으로 불리는 서울시 문화재 자료다. 흰 몸뚱이에 검은 나발 그리고 붉은 입술과 구슬 같은 붉은 약단지를 손에 받쳐든 부처의 발밑에 사람들이 엎드려 절을 하고 있다.


문득 참나무 어린 열매들 가운데 과연 몇이나 싹을 틔우고 온전히 나무가 될까 궁금하다. 해마다 가을이면 숲으로 열매를 흩뿌려놓은 나무 어미들은 어떤 기도를 할까. 불국사 경내에서 잠시 쉬며 가을볕을 쬐는 사이, 약사보전 처마 아래 풍경을 흔드는 바람이 속삭인다. 우리도 도토리를 떨군 참나무처럼 그렇게 비우고 또 비우는 것이 참선이고 기도라고.


여의천을 지나 양재 시민의 숲으로 가는 둘레길


먼 길을 돌아 산 너머 여의천 물길 따라


풍경 소리를 뒤로 하고 다시 숲으로 걷는다. 길 멀미가 날 즈음이면 어느덧 구룡산 자락 깊숙이 들어와 있다. 구룡산은 이름 그대로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의 산인데, 멀리서 바라보면 이웃한 대모산과 함께 솟은 봉우리가 어머니 젖가슴처럼 보인다. 실제로 탄천과 양재천 사이에 있는 두 산은 이름은 달라도 하나의 산줄기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대부분 대모산에서 이어진 구룡산 정상까지 곧바로 능선을 따라 걷는다. 정상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롯이 낮은 둘레길만 따라가는게 오히려 멀리 돌아가는 길이다. 대신 오르락내리락 다리품은 더 팔지만 둘레길에는 걸을수록 고요한 숲과 오롯이 하나가 되는 즐거움이 있다.


구룡산 개암약수터에서 잠시 쉬고, 능인선원 갈림길을 지나치면 비로소 산마루를 넘는다. 줄곧 산의 북사면을 따라 이어지던 둘레길이 능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면 내곡동이다. 옛날에는 안골, 안말 등으로 불리던 양지바른 왕릉의 마을이다. 세종대왕의 영릉도 처음에는 내곡 동에 있다가 예종 때 여주 땅으로 옮겨 갔다. 육교 위로 헌인로를 건너면서 잠시 뒤를 돌아본다. 대모산부터 구룡산까지 걸어온 길들은 이미 산 너머로 숨었다. 앞으로는 멀리 관악산이 손짓한다. 이제 여의천 물길을 따라 걷는 길만 남았다. 여의천은 구룡산 골짜기와 청계산으로부터 온 물줄기가 합쳐져 양재천으로 흘러 간다. 여의(如意)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으로‘마음먹은 대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대모산을 나와 여의천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스스로 뜻을 세워 제 길을 가야 한다. 도토리가 참나무가지를 떠나듯.


김선미
자연과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삶의 이야기들을 꾸준히 책으로 쓰고 있다. <소로우 의 탐하지 않는 삶> <외롭거든 산으로 가라> <산이 아이들을 살린다> 등을 펴냈다.


글 김선미(작가) 사진 나영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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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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