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新 서울 기행] 밝은 태양과 맑은 냇물의 고장 마천루 키 자랑하는 양천

문서 본문



목동 신시가지는 단지 안에 녹지공간을
넉넉히 조성하고 일방통행으로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등 획기적인
계획도시로 조성됐다.



도회적인 삶에 익숙한 편이지만, 양천에 오면 공연히 주눅이 들어 어딘가 숨고 싶어진다. 이때 안성맞춤의 도피처, 방송을 마치고 CBS 지하에 있는 교보문고 목동점으로 간다. 그곳에서 신문 서평에 쓸 신간도 훑어보고 가끔은 인근 언론사 후배들과 만나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웬 커피? 서점 한복판에 테이블이 몇 개 있는 커피숍이 있다. 책으로 둘러싸인 커피숍. 그런 독특한 구조가 맘에 든다.


이제 서점을 나와 목동서로를 따라 북상한다. 왼편으로 민영방송 SBS 사옥이 보인다. 남쪽에 오목공원을 정원으로 둔 복 받은 일터다. 10분쯤 걸어가니 제법 큰 공원이 나타난다. 그 이름 파리공원. 이름에 무슨 연유가 있겠지?


그렇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1987년 7월 1일 문을 연 공원이다. 그 전엔 목동 신시가지 제2근린공원이었다. 3만3천57m2 가까운 규모의 공원에는 서울광장과 파리광장·한불마당·야외무대광장·연못·분수대 등이 있고, 각종 체육 시설도 갖춰져 있다.


서울광장은 삼태극 무늬로 꾸몄고, 파리광장에는 프랑스식 화단을 조성하는 등 양국의 전통 양식을 살리느라 애쓴 흔적이 묻어난다. 목동 파리공원에 대한 답례로 파리에는 코로니 아파트 단지 내에 서울광장이 들어서 있단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항. 개화기 외국과의 수교가 거의 그랬듯 한불 수교 역시 순전히 프랑스의 강요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도에게 잔혹한 박해를 가하자, 188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 나루까지 올라와 조선군과 대치했고, 그 직후 양국이 수교하게 된 것이다.


나른한 봄날 오후, 나들이 나온 주민들이 제법 된다. 때마침 야외무대광장에서 젊은이가 색소폰을 불고 있다. 레퍼토리는 케니 G의 ‘Going Home.’ 몇몇 관객이 옹기종기 모여 그의 청아한 연주를 듣는다. 그러고 보니 헤어스타일도 케니G를 닮았다. 직업 연주가가 되려는가?
그렇다면 대성하길….


▲ CBS와 SBS 사옥이 있어 방송문화도 엿볼 수 있다 / 열병합발전소는 양천 일대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한복판 법안정사, 불자들 안식처
공원을 종으로 가로질러 길을 건너니 고층 건물 사이로 거대한 한옥 두 채가 나타난다. 현판을 보니 법안정사(法眼精舍), 그 뒤로 대웅전이다. 이따금 차를 타고 지나면서 생경하게 느꼈던 바로 그 한옥. 자세히 보니 4층으로 된 대웅전의 2층은 관음전이다.


산중 불교에서 탈피해 중생 속으로 파고들겠다는 전략으로 세운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서초동 수안불교회관, 양재동 구룡사, 개포동 능인선원 등과 함께 대표적인 도심 사찰이다. 목동 거주 불자들에게는 마음 공부 할 수 있는 최적의 안식처일 것이다.


이제 정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10여 분을 가니 또 공원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양천에는 공원이 지천이다. 하지만 이 공원은 성격이 좀 다르다. 용왕산근린공원. 공원 안에 산(해발 78m)을 끼고 있는 공원이다. 삼림욕을 하러 온 사람이 많다. 용왕산근린공원을 나와 안양천 변에 이른다. 천변으로 난 도로와 자전거도로, 잘 정비된 둔치를 보면서 잠시 예전을 떠올린다. 안양천 변은 한동안 상습 침수 지역의 대명사였다. 1970년대 말까지 오늘날 양천의 중심인 목동 일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 조정은 이곳에 대규모 말 목장을 만든다.
당연히 목동의 표기는 목동(牧洞).
그 후 무슨 연유인지 목동(木洞)으로 바뀌었고.
거기서 목마공원(木馬公園)이 유래했다.


상습 침수 지역이 신시가지로
1980년대 들어 정부는 주택 500만 호 건설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 일환으로 목동 신시가지 건설 사업이 시작됐다.


1980~1988년 강서구(당시) 목동과 신정동에서 진행된 이 사업으로 14개 단지에 2만6천600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뒤로도 시가지 조성은 단계적으로 이어져 2000년대 들어 시가지 조성이 완료되었다. 목동 신시가지는 단지 안에 녹지 공간을 넉넉히 조성하고 일방통행으로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등 획기적인 계획도시로 조성했다. 공공기관 및 공공시설도 질서 있게 배치했다.


안양천로를 따라 남하하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서울식품의약품안전처. 미 연방 식품의약국(FDA)을 본떠 1998년 출범한 식품의약품안전처(KFDA)의 서울 청(廳)이다. 참고로 양천구 유일의 국가기관은 신월7동에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다.


이어 양천 일대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열병합발전소를 지나 고가도로 밑을 통과하면 작은 공원을 만나게 되는데, 이름 하여 목마공원. 이 공원에 가면 목동의 유래를 알 수 있다.


먼 옛날 이 지역은 매우 기름진 땅이었으나, 잦은 범람으로 수리가 불안정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어 풀만 무성하게 자랐다 한다. 조선 조정은 이곳에 대규모 말 목장을 만든다. 당연히 목동의 표기는 목동(牧洞). 그 후 무슨 연유인지 목동(木洞)으로 바뀌었고. 거기서 목마공원(木馬公園)이 유래했다. 공원 안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목마상이 설치돼 있다. 이 목마는 1999년 태풍 ‘올가’ 때 쓰러진 40년생 수목을 재활용한 것이다. 공원을 지나 만나는 흰색 건물은 이대 목동병원. 1993년 개원한 이 병원은 2008년 폐원한 이대 동대문병원의 인력과 시설까지 통합, 양천구 유일의 종합병원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 목동에는 목동야구장을 비롯해 종합운동장, 아이스링크 등의 체육 시설이 있다/안양천 변의 영학정에 핀 벚꽃. 영학정에는 국궁장도 있다.


명문 사학, 스포츠 시설 포진
병원과 맞붙어 있는 학교는 양정중·고등학교다. 전문 학교로 출발했던 민족 사학 양정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최초로 2시간 30분대를 깨고 우승한 고(故) 손기정, 3위를 차지한 남승룡이 다닌 학교다. 중구 만리동 손기정공원 자리에 있던 양정은 1988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제2의 건학을 꿈꾸고 있다. 라이벌 배재와의 배양전(培養戰)으로도 유명하다.


10분쯤 더 남하하면 목동을 대표하는 체육 시설과 만나게 된다. 종합운동장과 목동야구장, 아이스링크 그리고 도로를 사이에 둔 테니스장. 게다가 천변 영학정에는 국궁장까지 있다.


스포츠 시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목동엔젤씨어터. 2006년 한국연극협회가 설립한 공연장이다. 양천구에 결핍되기 쉬운 공연 예술을 제공하기 위한 시설. 아쉬운 것은 <보물섬> 등 아동용 공연물이 주라는 점이다.


양천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오목로를 지나 남부 탐방에 들어간다. 아파트 단지 몇 곳을 지나 구로구와의 경계에 이르면, 산을 이고 있는 공원을 또 만난다.


갈산공원. 천변 쪽이 심하게 침식돼 급경사를 이루며 산 정상이 칼날처럼 보인다 하여 원래 ‘칼산’이라 부르던 것을 순화해 갈산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진풍경 연출하는 출입국사무소
갈산공원에서 서북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양천구청과 양천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이 근처에 관심을 끄는 기관이 하나 있으니 양천공원 동북쪽에 있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다.


요즘엔 대부분 재중 동포, 동남아 국가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나 결혼 이민 여성들이 많이 찾는다. 따라서 이곳에 오면 인종 전시장이란 느낌을 갖게 된다. 체류 연장이 허가돼 기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출국 명령을 받고 낙담하는 이도 보인다.


출입국사무소를 나와 서북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여자고등학교를 만난다. 진명여고다. 그러고 보니 재미있는 사실 하나. 양정과 진명은 숙명과 함께 구한말 고종의 후실이자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 이은 공의 어머니인 엄 귀비께서 거액을 쾌척해 세운 학교다.


양정은 1905년, 진명과 숙명은 1906년 각각 개교했다. 그런데 양정(1988년)과 진명(1989년 종로구 창성동에서)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양천구로 왔고, 숙명만 일찌감치(1980년 종로구청 뒤에서) 강남구 도곡동으로 갔다.


학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목동은 강남과 함께 학군 좋고 교육열 높은 곳으로 호가 나 있다. 오죽하면 ‘대치동(또는 강남) 엄마’에 필적하는 ‘목동 엄마’란 말까지 생겼을까. 그만큼 양천구의 교육 환경이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이를 민족사관고와 캘리포니아 공대를 거쳐 스탠퍼드대 대학원으로 보낸 목동 엄마 한 분을 필자도 알고 있다.


그런데 목동역 사거리를 중심으로 진명과 대각선상에 있는 목동 로데오거리는 양천의 이미지와 좀 거리가 있다.


서울에 수도 없이 많은 게 로데오거리지만 목동 로데오는 패션의 거리라는 느낌보다는 유흥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각종 식당에 노래방, 심지어 키스방까지 있다.


이제 서남쪽으로 향한다. 신정3동과 구로구 고척동이 공유하고 있는 계남근린공원에 가기 위해서다. 서울시가 ‘느긋한 도심길’로 선정하기도 한 이곳에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이로써 양천구 도보 탐방은 끝났다. 근데 뭔가 허전하다.


도대체 양천의 오리진은 어디 있는가? 양천의 유래를 찾기 위해선 탐방을 다시 해야 할 판. 양천현아지(陽川縣衙址)와 양천향교(陽川鄕校)터, 궁산(宮山)에 있는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 등, 장고 끝에 찾은 양천의 유래는 기이하게도 모두 강서구에 있었다.


▲ 안양천이 흐르는 양천구 전경


양천구는 공원이 지천이다.
교육환경과 다양한 체육시설도
갖추고 있어 주거 환경이 좋다.



▲ 한국과 프랑스 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문을 연 파리공원 / 공원 안에 국내에서 가장 큰 목마상이 설치된 목마공원


양천 유적이 왜 강서구에?
양천의 랜드마크여야 할 유적들이 왜 강서구에 있는 걸까? 1988년 양천구를 강서구에서 분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나온 탓이다. 당시 구(區) 경계를 획정하면서 실사(實査)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지도만 보고 줄을 긋지 않고서야 이런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겠는가!


9호선을 따라 등촌역-증미역-가양역-양천향교역 이북과 양천초교 및 궁산을 양천구에 포함시켰다면 이 같은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부턴 문헌상으로 양천 탐방을 다시 시작한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온조왕이 BC 5년(온조 14년) 하남에서 백제를 건국한 지 6개월 만에 한강 서북에 성(양천고성)을 쌓고 한성 백성 일부를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한동안 삼국 중 최강의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양천 지역을 발판으로 경인 지역을 장악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 후 이 지역은 통일신라가 출현하기까지 삼국의 각축장이 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구려 때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으로, 통일신라 때는 공암(孔巖)으로 불렸고, 고려 현종 때 수주(樹州) 임내(任內)에 통합됐다가 충선왕 때 양천현으로 격상, 고을 영(令)을 두었다고 한다. 특히 고려 시대 이 일대는 연꽃 군락지로 절경을 이루어 개경 왕실의 대표 휴양지였다나. 하지만 양천의 역사는 그보다 멀리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계남근린공원의 고인돌 추정 유적 말고도, 신정동 은행정 뒷산에 고인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신정동 토성지에서 청동 동촉한 점과 청동 유물, 와질토기 조각 등이 출토됐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일대가 수렵과 채집 경제에 의존하던 고대인들에게 천혜의 삶터였던 셈이다. 불행히도 유적에 대한 세심한 조사 없이 들이대는 바람에 암사동 선사 유적지에 버금갈 신석기 유적이 사라졌다.


아무튼 양천 지역은 예부터 한양에서 부천, 인천, 김포, 강화로 통하는 가장 빠른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세인들의 내왕이 잦았다. 백성들은 양화진에게 한강을 건너 철곶포(鐵串浦) 나루에 당도해, 오목교를 지나 정랑고개를 넘나들면서 경인 지방의 농산물과 수산물, 특히 소금을 운반했다.


조선조에 들어 1414년(태종 14년) 금천(衿川)을 양천과 통합, 금양현(衿陽縣)으로 불리다 다시 독립, 금천군과 양천현이 됐다. 그 후 1895년(고종 32년) 인천부 관할 양천군으로 개칭됐다가, 일제의 한국 강점 후인 1914년 김포군으로 통합됐다. 1963년 서울 영등포구에 귀속됐고, 1977년 강서구가 영등포구에서 분리되자 강서구의 일부가 됐다가 1988년 1월 강서구에서 분리, 비로소 독립 자치구가 된다.


잃어버린 옛 이름을 74년 만에 되찾은 것이다.





글 윤재석(언론인) 사진 나영완 일러스트레이터 문수민

문서 정보

[新 서울 기행] 밝은 태양과 맑은 냇물의 고장 마천루 키 자랑하는 양천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7-19
관리번호 D0000028036644 분류 기타
이용조건타시스템에서 연계되어 제공되는 자료로 해당기관 이용조건 및 담당자와 협의 후 이용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