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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둘레길] 길을 여는 도봉산, 다시 처음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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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8코스

서울둘레길 종주의 마지막 구간은 북한산을 지나 도봉산 자락에서 마무리된다. 높고 큰 암봉을 우러르며 인체에 빗대자면 발등께에 해당하는 산자락을 골골이 넘나드는 이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첫발을 뗀 도봉산역에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그곳에는 또 다른 출발점이 기다리고 있다.



맑은 물 넘치던 화계로 가는 흰구름길


사대문 안을 ‘시내’로 칭하던 시절에 비하면 서울은 무척 넓어졌다. 동서남북, 강 건너로도 밀집 주거지역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북한산과 도봉산은 서울의 정점이다. 숱한 세월이 흘러도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한북정맥이 한강 북쪽에서 도봉산 북한산으로 솟구쳐 서울의 진산이 된 것도 변함없다. 


성북구를 거친 둘레길은 솔샘길에서 흰구름길로 접어들며 강북구로 이어진다. 시내에서 혜화문 넘어 삼선교 돈암동부터 의정부와 만나는 서울 동북부는 모두 성북구였다. 1973년 도봉구가 분리되고, 여기서 1995년 미아동·번동·수유동·우이동 등이 다시 강북구로 분구되었다. 북한산에 기댄 자치구는 여럿이지만 역시 강북구가 북한산에 종주 의식을 가질 만하다. 3개의 뿔처럼 우뚝 솟은 인수봉, 백운대, 만경봉이 이룬 삼각형은 이 산이 삼각산으로도 불린 이유를 확인하게 해주고, 예나 지금이나 우이동이 대표적인 북한산 등산로 초입인 점도 그렇다.


흰구름길이 지나는 강북구 수유동의 화계사. 해외 포교 활동이 활발한 국제선원이 있다.

소나무 1,000여 그루가 우거진 우이동 솔밭근린공원에서 솔밭길이 이어진다.


흰구름길은 빨래골에서 수유동 쪽으로 이어진다. 계곡물에 흰 빨래를 주무르며 시름도 걱정도 씻어냈을 옛사람들의 눈길이 가 닿았을 산봉우리와 계곡을 떠올려본다. 빨래골에서 길을 건너 오르막을 올라가면 이내 구름전망대를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칼바위능선부터 인수봉까지 이어지는 북한산 주 능선과 이웃한 도봉산의 오봉, 만장봉, 자운봉까지 예사롭지 않은 서울의 눈부신 바위들을 바라볼 수 있다. 


둘레길 아래쪽은 오밀조밀 크고 작은 집이 모여 있는 일상의 공간이지만 산 쪽은 신의 거처인 양 구름을 이고 있는 산정의 광경이 시공을 초월한 공간처럼 그윽하다. 서울둘레길은 이렇게 서울의 둘레면서 일상의 변두리다. 그래서 둘레길을 걷다 보면 비로소 중심을 낯선 눈길로 돌아볼 수 있다. 바쁜 일상에 쉼표를 찍고 묵묵히 숲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 이 길의 미덕이다. 


뜬구름처럼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전망대를 내려오면 길은 화계사에 다다른다. 화계사는 조선 시대 말에는 ‘궁절’이라 불릴 만큼 왕실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서, 인근 빨래골로 궁녀들이 빨래를 들고 모여들었다는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흥선대원군의 친필이 걸린 명부전뿐 아니라 가람마다 대가의 글씨가 담긴 현판이 걸려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진달래능선 아래 솔숲으로 이어지는 순례길


화계사를 지나면 둘레길은 통일교육원 앞에서 잠시 산길을 벗어난 뒤 순례길로 이어진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묘소와 4·19 민주묘역까지 격랑이 일던 우리 근현대사에 뜨거운 흔적을 남긴 선열을 떠올리며 걷게 되는 길이다.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다.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못하고 잘 죽으면 도리어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함께 알지어다.” 


이 구간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이준 열사 묘역에 새겨진 글귀다.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된 그는 조국의 운명을 국제사회에 하소연하려고 했으나 이마저 일제의 방해로 뜻대로 되지 않자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네덜란드에 있던 그의 유해를 북한산 양지바른 기슭으로 옮긴 것은 1963년의 일이다. 왕릉 앞에나 있을법한 홍살문까지 세우며 당시 정부는 열사의 묘를 치장했다. 그러나 교과서에서조차 망국의 치욕과 통한의 기록을 희미하게 지우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열사는 어떤 눈길로 지켜보고 있을까.


순례길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이준 열사 묘역


순례길은 북한산 진달래능선 아래 양지바른 산자락이다. 굳이 순례길이라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해마다 4월이 되면’ 진달래 꽃길을 순례하는 이들이 꾸역꾸역 몰려든다. 


길은 이내 우이동 솔밭근린공원을 지나는 솔밭길로 접어든다. 덕성여대 맞은편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한 솔밭공원은 아파트 단지로 개발될 뻔했으나 2004년 서울시와 강북구에서 사유지를 매입해 가까스로 벌목을 피하고 근린공원으로 살아남았다. 솔밭공원에서 새 떼처럼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주택가에 섬처럼 남아 있는 솔숲이 새삼 고맙다. 


소나무 숲길은 산자락 끄트머리 손병희 선생 묘소를 지나 등산객으로 붐비는 우이동 등산로 들머리에서 잠시 숲을 빠져나온다.

                       

북한산에서 도봉산으로, 사연 많은 왕실 묘역 따라


우이동에서 미아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삼양로다. 삼각산 아래 양지바른 동네 삼양동, 서울이 무한 팽창하던 1960~1970년대 대표적인 달동네의 지명은 이제 길 이름으로만 남았다. 


더는 자동차가 갈 수 없는 삼양로 북쪽은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로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에 닿는 우이령으로 뻗어 있고, 두 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은 우이천으로 모여 강북구와 도봉구를 가르며 중랑천을 향해 흘러간다. 


우이동에서 삼양로 건너 방학동 야트막한 산자락을 오르면 왕실묘역길이 시작된다. 방학동 원당마을에는 왕좌에서 끌려 내려와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연산군의 묘가 있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예술적인 감각이 빼어났다는 젊은 군왕을 무너뜨린 것은 상처와 분노였을 것이다. 왕릉이 되지 못한 연산군 묘 앞에서 잠시 다리를 쉬다 보면 ‘두 번째 화살’에 맞지 말라는 불교 경전을 떠올리게 된다. 처음 상처는 타인이 입힌 것이지만 몸과 정신을 무너뜨리며 스스로에게 화살을 쏜 것은 분노에 사로잡힌 자신이었을 테니 말이다. 


연산군 부부의 묘 아래 태종의 마지막 후궁 의정궁주가 묻혀 있고, 그 아래에는 연산군의 딸과 사위 묘가 있다.


왕실묘역길이 지나는 방학동 원당마을에 있는 연산군 묘역.

우이령 남쪽 북한산과 도봉산 골짜기로 흘러내려 강북구와 도봉구의 경계로 흐르는 우이천.


의정궁주 역시 이미 늙은 태종의 비로 간택되었으나 혼례도 치르지 못하고 과부가 된 비운의 주인공이다. 누구나 제 몫의 고난을 지고 가는 것이 인생이겠으나 왕실의 영화가 화려한 만큼 드리운 그늘도 그만큼 짙고 깊었을 것이다. 


연산군 묘 앞에는 550세도 더 된 은행나무가 방학동 아파트 숲을 배경으로 장엄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서울에 있는 나무 가운데 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 다음으로 오래된 나무다. 나이로 보아 인근에 의정궁주 묘가 들어선 1454년경에 심은 것 아닐까 추측된다. 옛사람들이 아들을 점지해달라거나 산모의 젖이 잘 나오게 해달라고 빌던 나무라는데, 1990년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때 근처에 있던 암그루를 벤 뒤 나무는 홀아비 신세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홀로 남은 수나무라도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끝에 새로 짓던 아파트 단지 설계를 변경하고 주변 빌라를 철거해 주변을 원당샘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에서 나오면 왕실묘역길 끝자락에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남편 양효공 안맹담의 묘도 있다. 총명했던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에도 공헌했다고 한다.


연산군 묘역 앞을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는 서울에서 두 번째로 수령이 오래된 나무다.


근심 없는 골짜기, 무수골 너머 도봉을 나오다


둘레길은 사연 많은 무덤을 뒤로하고 시루봉 기슭을 따라 도봉산 우이암과 보문능선 사이에 있는 무수골을 향해 이어진다. 무수골은 ‘물골[水谷]’에서 유래한 지명일 텐데, 사람들은 ‘근심이 없는(無愁) 골짜기’라는 뜻으로 기억하고 싶어 한다. 


산굽이를 돌아들 때마다 나무 사이로 도봉산 바위 봉우리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사라졌다 한다. 마침 능선 전망이 시원한 지점에 나선형 계단을 쌓아 올린 두 기둥을 연결한 쌍둥이전망대가 우뚝 솟아 있다. 장쾌하게 솟구친 도봉산 암봉들이 봄볕을 튕겨내며 희부연 꽃처럼 빛나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서울의 진산은 북한산이지만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 산줄기는 도봉산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도봉(道峰)이라는 이름을 조선 왕조의 길을 연 봉우리라 풀이하기도 한다. 


길은 야트막한 산자락을 넘나드는 숲길 끝에서 도봉사, 능원사 일주문 앞 넓고 평탄한 길을 따라 내려가 도봉탐방지원센터에서 산을 빠져나간다. 


터벅터벅 도봉산 들머리를 걸어 내려오다 보면, 이 산자락에서 닭을 키우며 살던 시인 김수영이 떠오른다. 도봉계곡 입구에는 그의 시 ‘풀’을 새겨 넣은 시비도 서 있다. 도봉산에서 쏟아져 내려온 등산객들이 식당마다 왁자하게 이야기판을 벌이고 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받은 자잘한 상처로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결국 ‘바람보다 먼저 웃는’ ‘풀’ 같은 이웃들. 그들이 지나온 북한산과 도봉산을 힐끔 뒤돌아보고 도봉산역 너머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듯 서 있는 수락산과 불암산을 다시 만난다. 


이제 둘레길은 서울을 한 바퀴 다 돌았다. 그새 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세 번 바뀌고, 세상에는 또 많은 사연이 피어나고 스러졌다. 사람들은 다시 그 길 위에 새 길을 내며 저마다의 삶을 밀고 가고 있다.


무수골로 가는 둘레길 중 방학동길 구간에 있는 쌍둥이전망대는 도봉산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다.


근심이 없는 골짜기라는 뜻의 무수골에 조성된 생태체험학습장에서 바라본 도봉산.

김선미

자연과 사람에게서 배우는 삶의 이야기를 꾸준히 글로 쓰고 있다. <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 <외롭거든 산으로 가라>, <산이 아이들을 살린다> 등을 펴냈다.





글 김선미 사진 나영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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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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