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생겼다 서울 인문학 살롱 ⑦]돈의문 박물관마을에서 서민의 주거 문화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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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박물관마을은 1910년 골목이 형성된 이후 현재까지
100년 동안 일제강점기 건축물부터 현재의 건축물까지
다양한 서민 건축물이 공존하는 곳이다.

철거 대신 보존을 택한 이곳에서 서울 서민의 주거 문화와 건축 변천사를 읽어본다.



“7시 수학 과외를 마치고 S고 옆 광화문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서울서 과외 소굴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집집마다 과외 학생들에게 셋방을 놓고 있다. 4평 남짓한 조그마한 방. 둥근 테이블에 15명의 학생이 자리를 잡았다. 흑판 앞에 서 있던 과외 선생은 이번 달 방세가 4만5,000원으로 결정된 모양이니 각자 3,000원씩 거둬서 내일까지 주인아주머니에게 내라고 했다.”

1980년 2월 7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어느 여고생의 하루’라는 기사 중 일부다. 서울에 과외 소굴이라고 불리는 동네가 있었다니, 도대체 그 기사에 나온 S고 옆 광화문 주택가는 어디일까? 바로 새문안 동네다.

1960년대부터 과외 금지령이 내려진 1980년 7월까지 새문안 동네는 서울의 대표적 과외방 밀집 지역으로 유명했다. 주변에 덕수초, 서울고, 경기중, 경기여고, 경기고 등 명문 학교가 있었고, 광화문과 종로2가 일대에는 유명 입시 학원이 많아 사교육의 적지였던 것. 그러다 1976년 경기고를 필두로 명문 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고 과외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과외방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그 과외방을 다시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강북 삼성병원 옆 돈의문 박물관마을이다. 남쪽으로는 새문안로, 북쪽으로는 경희궁과 인접한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지은 도시형 한옥과 일본식 주택, 1970~1980년대 양옥 등 여러 시대의 건축물과 삶의 흔적이 다양하게 혼재된 마을이다. 돈의문(1915년에 철거한 서대문) 주변을 2003년 돈의문 뉴 타운으로 재개발하면서 돈의문재개발조합이 이 부지를 기부했다. 기부한 부지는 보통 공원이나 커뮤니티 시설 등으로 조성하기 마련인데, 서울시는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면서 문화시설을 더하는 도심 재생 방식으로 개발해 지난해 9월 돈의문 박물관마을을 개관했다. 보수와 신축 등으로 정리된 가옥은 공연·전시·창작·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그 중 한옥 체험 문화 공간으로 다시 지은 도시형 한옥들이 바로 과외방이 있던 집들이다.

한옥이면 한옥이지 도시형 한옥이라니?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농어촌에서 많은 사람이 경성으로 이주하면서 집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1930년대 토지 구획 정리를 하면서 나라 소유의 큰 필지 땅을 작은 필지로 정리했고, 이 자리에 10평 정도로 간소화한 한옥을 지어 팔았다. 도시형 한옥은 안채와 문간채를 ㄷ자로 연결해 좁은 공간의 효율성을 높이고, 대청에 유리문을 달아 마루 겸 복도로 이용했다. 문간채는 대문 옆에 바싹 붙여 주로 전세를 주거나 아이들 방으로 썼는데, 이곳이 바로 과외방이다.

마을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인 동네

새문안 동네의 역사는 깊다. 1422년 돈의문을 세우고 1623년 경희궁을 지으면서 이 일대는 비교적 규모가 있는 사대부 가옥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차가 개통되고, 조선총독부는 도로 직선화 등을 이유로 1915년 돈의문을 철거하고 불규칙하게 지은 집들을 정비했다.

돈의문을 철거한 후 이 동네에는 다양한 공간적 변화가 일어난다. 조선청년총동맹, 서울청년회, 조선노동교육회, 무산자동지회 등 사회주의 계열 단체가 사무실로 이용했으며, 1930년대에 강위수라는 사람이 이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고 필지를 분할해 도시형 한옥을 조성했다.

한옥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1932년 유한양행이 이곳 일대 부지를 매입하고 사옥을 신축했다. 곡선으로 휘어지며 언덕이 있는 지형을 따라 서양식 건물을 지었다. 유한양행은 1936년에 주식회사로 상장했으며, 1962년 신대방동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30년간 이 건물을 본사로 사용했다. 이후 연탄 회사인 강원산업의 사옥, 현대제철 서울영업소로 활용했다.

1938년에 지은 경교장은 김구 선생의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한 곳으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이승만의 이화장, 김규식의 삼청장과 더불어 혼란 정국을 수습하는 중요 정치 공간이었다. 1949년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이후 경교장은 1949년 11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사용하기도 하고, 1950년 6월부터 8월까지는 한국전쟁 중 미군 특수부대와 임시 의료진이 주둔하기도 했다. 1956년 10월부터 1967년 10월까지는 베트남 대사관으로 사용했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돈의문 박물관마을 일대는 송월길 가로변을 중심으로 식당이 생기기 시작해 점차 인근의 회사원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가로 발전했다. 1981년 교육청이 송월동으로 이전했으며, 같은 시기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고층 빌딩을 짓고, 경향신문과 문화방송국 정동 사옥 등이 들어서면서 유동 인구가 많아진 것이다.

도심 재개발 바람에도 이곳은 조용했다. 덕분에 일제강점기 주택부터 1980년대 양옥까지 서울의 근현대 주택을 함께 볼 수 있는 소중한 지역이 됐다.

유한양행

유한양행이 30년간 본사로 사용하다가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후 강원산업의 사옥, 현대제철 서울영업소로 활용했다.

일제가 지은 관사와 사택이 선망의 대상

초가집과 한옥이 주였던 우리의 전통 가옥 형태는 조선 말 개항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서양인은 벽돌로 이층집을 짓고 양철이나 함석,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었다. 일본인은 나무를 이용해 이층집을 지었다.

1910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한 일제는 국유지를 마음대로 활용해 관청과 관사, 사택 등을 지었다. 관사와 사택은 ‘적산 가옥’, ‘문화주택’으로도 불렸다. 벽돌이며 유리 같은 값비싼 재료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테이블과 의자, 당시 신문물인 피아노와 축음기가 놓인 인테리어는 유학을 다녀온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 피아노 한 대만 사주면…”이라는 만화를 실으면서 문화주택의 유행을 풍자하기도 했다.

한국의 주택 건설은 휴전 이후에 재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서울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집과 자재가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많은 사람이 군용 텐트를 이용하거나 폐건축자재로 개천가나 산등성이의 국유지에 불법으로 판잣집을 지었다. 청계천 판잣집촌과 후암동·이태원 일대의 해방촌이 대표적 사례다.

정부는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공영주택 공급을 목적으로 만든 ‘조선주택영단’을 ‘대한주택영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급한 대로 흙벽돌에 시멘트로 마감한 9평짜리 ‘재건주택’을 도심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싼 자재로 지은 작은 집이었지만, 서울 시민 입장에서는 제법 수준 높은 집으로 여겨져 ‘9평의 꿈’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일제 가옥

일제강점기에 지은 일제 가옥. 문화주택으로 불리며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0.6평의 식모 방과 반지하의 미니 2층 양옥

1950년대 후반, 시멘트 생산이 본격화되고 주택 건설을 위한 융자 지원이 가능해지면서 1960년대는 ‘희망주택’ , ‘부흥주택’으로 불리는 민영주택이 대거 건설되기 시작했다. 주택공급이 공공에서 민간으로 이전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양옥’이라고 부르는 서양식 가옥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

서울시립대 박철수 교수는 <거주박물지>에 1960년대 주거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식모 방`이라고 썼다. 한국전쟁 이후 전쟁고아와 미망인이 늘어나면서 식모가 새로운 직업으로 등장한다. 웬만큼 여유 있는 집에서는 식모를 두었고, 그에 따라 식모가 기거할 방이 필요해 집을 지을 때 아예 식모 방을 설계하기도 했다. 식모 방은 보통 0.6평 정도로 부엌 옆에 위치했고, 거실을 거치지 않고 나갈 수 있도록 뒷문을 만들어 달았다. 주인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식모 살이의 설움이 주거 공간에서도 느껴진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미니 2층 양옥이 유행했다. 산업화 영향으로 서울 인구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집은 늘 부족했다. 이에 반지하를 만들어 세를 놓은 이층집이 새로운 주택형태로 각광받았다. 자재가 부족해 완전한 이층집은 짓기 힘든 시절이었다. 마침 미니스커트가 유행해 덩달아 이런 집도 미니 2층 양옥으로 불렸다. <응답하라 1988>에서 정환이와 덕선이의 집이 바로 이런 양식이다.

박물관마을 리모델링 전

도심 한가운데 있었지만 개발의 손길이 비켜가 최근까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돈의문 박물관마을의 리모델링 전 모습.

대한민국은 아파트공화국

1970년대 주택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아파트의 등장이다.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曉時)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 일제강점기 서울 회현동에 들어선 미쿠니아파트나 충정로 토요다아파트, 혹은 1958년 고려대 앞에 지은 종암아파트를 시초로 꼽기도 한다. 17평 규모로 152가구이던 종암아파트 준공식엔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주택공사가 1961년 마포구 도화동에 건설한 마포아파트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아파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 아파트의 특징인 단지형 아파트가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포아파트는 ‘근대화’와 ‘생활 혁명’의 상징으로 꼽히기도 한다. 재래식 화장실과 아궁이식 부엌을 없애고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부엌을 들여온 것이다.

1970년부터 시작된 아파트 건설로 서울시 면적의 30%가 아파트 단지로 채워졌다(2010년 기준). 그리고 서울의 스카이라인도 아파트 외관이 결정짓고 있다. 또 주거 공간이라기보다 투자 개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과연 ‘아파트공화국’ 이라 할 만하다.

광화문 인근에 높은 빌딩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가운데에서도 새문안 동네는 개발에서 소외돼 옛 모습 그대로 존재해왔다. 오래된 주택은 음식점, 여관, 카페 등으로 쓸모가 바뀌면서 주머니 가벼운 서민에게 가성비 좋은 먹거리와 여유를 제공했다.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재단장한 돈의문 박물관마을을 둘러보다 보니 작더라도 내 집이면 행복했던 그 시간과 기억들이 불현듯 소환됐다. 요즘 아파트를 구입하면서 가족이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무릇 집이란 하우스(house)가 아닌, 가족의 행복이 움트는 홈(home)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돈의문 박물관마을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건물이 혼재된 돈의문 박물관마을은 말 그대로 동네 자체가 건축 박물관이다.

주거 문화의 역사

1920년대

1920년대 경성우편국, 르네상스식 건물로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외양(外樣)은 붉은 벽돌과 돌을 혼합해 건축했다.

1930년대

1930년대 토지 구획 정리 사업으로 조성된 지역에 들어선 도시형 한옥. 사진은 안암동1가 일대 한옥 밀집 지구다.

1950년대

1950년대 해방과 한국전쟁 직후 서울로 몰려든 도시 빈민이 지은 세운상가와 청계천 주변의 판잣집

1958

1958 종암아파트.그 당시 정치인, 예술인, 교수 등 상류층이 입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1961

1961 ‘9평의 꿈’으로 불리던 ‘재건주택’ 단지 모습. 응암동, 연희동 일대다.

1962

1962 서울시가 성북구 길음동 택지 조성 지구에 건립한 공영주택 100개 동의 입주일 풍경.

1977

1977 강남 아파트 열풍을 주도한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 전경

1980년대

1980년대 서민을 위한 다세대주택, 연립주택이 강북 지역에 대거 조성됐다. 사진은 아현동 85번지

2002

2002 부의 상징인 초고층 아파트 바람을 일으킨 타워팰리스

돈의문 박물관마을에서 꼭 봐야 할 건축물

1/한옥 체험 공간

7·8번지 일대는 1930년대에 이 일대가 분할되면서 한옥 골목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독립운동과 관련한 여러 단체가 모임을 하거나 교육장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도시형 한옥은 북촌 등지의 한옥과 달리 경사진 구릉지에 지어 일반 5량식 구조가 아닌 한쪽으로 작은 툇마루가 있는 4량식이며, 10평 정도의 규모였다. 1960~1980년대에는 과외방과 하숙집으로 쓰였고, 근처에 병원, 방송국, 관공서가 들어오면서부터는 모든 한옥이 식당으로 변모했다. 서울곰탕, 문화칼국수, 풍미추어탕 등이 유명한 식당이다.

한옥체험공간

2/유한양행 터

1926년 종로2가 YMCA에서 회사를 설립한 유한양행은 1932년 이곳에 부지를 매입하고 신축 이전했다. 당시 근대 한양도성이 있던 언덕길의 모양을 따라 세 채의 서양식 건물을 새로 짓고 1936년에 주식회사로 상장했다. 이 건물은 1962년 신대방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30년간 유한양행 본사로 쓰였다. 교남 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인한 도로 확장으로 유한양행 사옥 중 두 채는 철거되었고, 남은 한 채는 돈의문 박물관마을 사업으로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유한양행

3/돈의문 전시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이탤리언 레스토랑 ‘아지오’와 한식당 ‘한정’이 사용하던 건물이 돈의문 전시관이 되었다. 아지오는 벽돌 구조의 슬래브 지붕 건물을 이탈리아풍으로 마감하고, 남북 양쪽의 테라스를 적극 활용한 것이 특징으로, 유럽풍의 이색적 분위기 덕에 인기가 많았다. 한정은 원래 주택이던 집을 식당으로 개조한 곳으로, 주변 관공서나 회사의 접대 식당으로 인기가 높았다. 마당을 멋스럽게 만들어준 괴석은 경희궁 흔적으로 밝혀져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돈의문 전시관

4/서대문여관

한국전쟁으로 가옥이 파괴되고 5년 뒤에 2층 목조 주택으로 새로 짓고, 1961년 현재의 건물로 증축해 1984년부터 서대문여관으로 운영했다. 서대문여관은 주변 대기업이나 공공 기관에 교육을 받으러 지방에서 출장 온 이들이 저렴하게 묵을 수 있는 곳이었다.

서대문여관

5/카페 ‘LP BAR’

개인 소유이던 이 건물에 1924년 <신천지>라는 잡지를 발행하던 출판사가 둥지를 틀었다. 1964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창조사’라는 출판사가 있었고, 최근까지 식당 ‘쿠이’, 카페 ‘LP BAR’로 운영되었다. 마을의 두 골목길이 만나는 길목에 나무가 있는 마당, 박공지붕 건물이 이루는 모습이 시대의 변화를 넘어선 정겨운 풍경이다.

카페 ‘LP BAR’

6/한·일·양이 복합된 한옥

1956년 신축해 계속 주택으로 사용하던 집이다. 1층은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아래채로 구성된 한옥 평면이고, 2층은 테라스와 서재 등으로 구성된 서양식 평면이지만 구조는 일식 목조 주택을 짓는 방법으로 지어졌다. 한옥을 기본으로 하되 일본의 기술로 짓고, 서양 주택의 로망까지 담은 중요한 건축물이다.

한·일·양이 복합된 한옥

돈의문 박물관마을 8월 추천 프로그램

마을 축제 ‘돈의문이 열려 있다’

기간 8월 1~31일

프로그램 런치 라이브,우리나라 근현대 그림책 전시, 근대 한복 전시, 돈의문 한국화로 읽다, 돈의문이 열려 있다 등

도시의 휴일

기간 8월 3·10·17·24·31일 오후 8시

프로그램영화 <해변의 폴린느>, <휴일> 등 상영

그림책, 방

기간 8월 1~31일

프로그램일러스트레이터 선미화 작가의 작품 전시

공적상상(公的想像): 새로운 남북 관계 속공공 공간에 대한 상상

기간 8월 2~14일

프로그램새로운 남북관계속에서 상상해보는 도시 공공 공간의 미래에 대한 전시

익스페리멘탈 사운드 플레이

기간 8월 매주 토요일

프로그램사운드 작업의 실험적이고 확장된 표현과 즉흥을 기반으로 음악적 영역의 범주를 알아보는 공연

어반클래식라이브

기간 8월 17·24일 낮 12시 30분~오후 1시

프로그램첼리스트 김영민과 친구들(17일), 모던 가야그머 정민아의 서공철류 가야금 산조(24일)

*문의 02-549-2234, www.dmvillage.info

이정은일러스트 조성흠사진 홍하얀

참고자료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 <전근대 서울의 건축>, <근현대 서울의 건축>(서울역사편찬원), <돈의문 백서>

사진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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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겼다 서울 인문학 살롱 ⑦]돈의문 박물관마을에서 서민의 주거 문화를 보다 - 문서정보
관리번호 D0000034154958 등록일 2018-08-07
분류 기타
원본시스템 서울사랑 제공부서 시민소통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한해아 생산일 2018-07-30
라이선스 CC BY-NC-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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