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서울

다른 듯 닮은 남대문시장과 회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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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동

지난번 서울역 서부 지역에 이어 이번엔 그 맞은편인 남대문시장과 회현동을 찾아가본다. 핵무기와 탱크 빼고 다 있다는 남대문시장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고, 남산골 선비 중에서도 어진 선비들이 모여 살았다는 회현동은 점잖았다. 퇴계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한 두 동네에서 다른 듯 닮은 삶을 보고 왔다.

“핵무기와 탱크 빼고 다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대문시장에서는 의류, 주방용품, 가전제품, 토산품 등 다양한 물건을 만날 수 있다. 5,400여 개의 소규모 점포가 상품을 직접 생산·판매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전통시장이자 도매시장으로 외국 관광객도 하루에 40만 명 이상 다녀간다고. 조선 시대에 출납을 맡아보던 선혜청이 남대문 부근에 설치되고 시전이 들어서면서 시장이 형성됐다.

“50년 전에는 야채·과일상, 건어물상, 생선상, 고기상이 주를 이뤘어요. 그런데 1970년대에 노량진시장, 가락동시장이 생기면서 상인이 그쪽으로 많이 넘어가고, 옷 도매상이 들어오면서 옷으로 유명해졌죠. 새벽에는 도매상이 장사하느라 북적북적, 낮에는 소매상이 장사하느라 시끌벅적, 하루 종일 활기가 넘치던 곳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남대문시장에서 5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중앙식당의 김귀례 씨는 손님도, 활기도 많이 줄었다고 아쉬워한다.

상인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남대문시장 배달의 기수, 밥집 아줌마. 남대문시장의 바쁜 일상이 이 뒷모습에 모두 담겨 있다.

상인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남대문시장 배달의 기수, 밥집 아줌마. 남대문시장의 바쁜 일상이 이 뒷모습에 모두 담겨 있다.

서울역 고가 보행로가 설치되면 관광객 늘 것으로 기대

“상인 중에는 서울역 고가 폐쇄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열심히 장사를 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지. 오후 4시면 문 닫고 주말에도 문 닫고…. 그러니 누가 찾아오겠어요. 우리 가게가 밤 9시에 문을 닫는데, 퇴근할 때 보면 시장이 얼마나 썰렁한지 몰라요.”

김귀례 씨는 예전에 약수고가나 청계고가가 철거될 때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지금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며 서울역 고가도 보행로로 재단장하면 관광객이 늘어나고 그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이 남대문시장을 찾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만 주차 공간이나 쉼터가 부족하니 그 부분만 해결된다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서울역 고가는 총 939m를 보행로로 재단장하고, 철길로 끊긴 서울역 일대를 17개 보행로로 그물망처럼 연결하는 ‘서울역 7017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태어날 예정이다.

남대문시장은 의류, 섬유 제품, 주방용품, 가전제품, 민예품, 토산품, 먹거리 등 웬만한 물건은 다 있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전통시장이다.

남대문시장은 의류, 섬유 제품, 주방용품, 가전제품, 민예품, 토산품, 먹거리 등 웬만한 물건은 다 있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전통시장이다.

■ 전통을 느낄 수 있는 시장으로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 중앙식당 주인 김귀례 씨 -

중앙식당 주인 김귀례 씨

남대문에서 장사를 한 지 벌써 50년 됐어요. 전라도 광주에서 빈손으로 올라왔으니 할 수 있는 게 있어야지. 그나마 음식 만드는 건 자신 있어서 지금 이 자리에 솥단지 걸어놓고 음식 장사를 시작했지요. 반찬으로 갈치조림을 했는데 그게 인기가 많더라고요. 다들 갈치조림만 찾는 거라. 그래서 아예 갈치조림으로 바꿔버렸지. 입소문이 나서 시장을 찾은 손님도 많이 오고, 옆 식당들도 하나 둘씩 갈치조림을 하면서 아예 갈치 골목이 돼버렸지요. 지금도 식사 시간이면 줄을 서는데, 예전에는 말도 못 했어요. 저녁에 집에 와서 전대를 풀면 이불 위에 수북하게 돈이 쌓였다니까. 그때 비하면 지금은 절반도 안 되는 거예요.
저희 집은 갈치조림도 맛있지만 밥맛이 참 좋아요. 고슬고슬 갓 지은 밥을 내거든. 한 솥씩 해도 금세 동이 나니까 가능하죠. 딸과 아들이 대를 이어서 하겠다며 배우고 있는데, 저는 늘 이런 말을 해요. “힘들고 짜증나도 손님한테는 무조건 친절해라.” 시장 도느라 아픈 다리 끌고 밥 먹으러 왔는데 불친절해봐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지. 50년 동안 남대문시장도 많이 변했어요. 세상이 변하는데 시장도 변해야죠. 하지만 정통성은 지켜줬으면 해요. 여기는 마트가 아니잖아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전통시장 고유의 모습은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 주소 : 남대문 시장길 22-1
- 문의 : 02-752-2892

남산골 명물 호떡

가난하지만 대쪽 같은 선비들이 살던 남산골

남대문시장 명물인 잡채호떡을 사 들고 퇴계로를 건너 회현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조선 시대, 경복궁과 가까운 북촌에는 권세가 높고 돈 많은 세도가들이 산 반면, 사대문 밖 남산 기슭의 남촌(남산골)에는 가난하거나 몰락한 선비들이 모여 살았다. 이들은 가난하지만 성품이 대쪽 같아서 권세가의 부정부패가 드러나면 들고일어나 탄핵을 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덕분에 “남산골 샌님 자기 벼슬은 못 챙겨도 다른 사람의 벼슬 뗄 재주는 있다”라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다고. ‘남산골 샌님’은 궁색하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꼿꼿한 선비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다.

남촌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현저동으로 강제로 옮기고 산 중턱까지 일자로 계단을 놓았다. 그리고 그 끝에 ‘조선 신궁’이라는 일본식 사당을 세운 후 남산 주변에 일본인이 사는 마을을 만들었다. 그래서 회현동에는 아직까지 일본식 가옥이 몇 채 남아 있다. 이후 해방이 되면서 남산을 중심으로 서울예술전문학교 등 교육기관과 수도방위사령부, 중앙정보부 같은 정부 기관이 들어서고 은행들이 자리 잡으면서 서울 중심지로 변모했다. 그런 격변 속에서도 소박한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동네가 바로 회현동이다.

남산골에서도 어진 선비가 많이 모여 살던 회현동에는 조선 시대 대동미와 포전을 거두어들이는 관아가 있던 선혜청터, 조선 시대 난전 중 하나로 쌀, 포목, 어물 등을 매매하던 칠패시장터, 관악산 화기를 막기 위해 조성한 연못터 중 하나인 남지터,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의 집터 등 역사적인 곳이 많다.

회현동의 역사 문화 자원을 바탕으로 ‘회현동 남산옛길’을 조성했다(좌), 회현동 입구 은행나무 쪽에서부터 회현동 시범아파트에 이르는 560m 구간이 주요 코스다(우)

회현동의 역사 문화 자원을 바탕으로 ‘회현동 남산옛길’을 조성했다(좌), 회현동 입구 은행나무 쪽에서부터 회현동 시범아파트에 이르는 560m 구간이 주요 코스다(우)

반세기를 버티고 퇴역을 앞둔 회현 시범아파트의 운명은?

중구청에서는 이러한 역사 문화 자원을 바탕으로 ‘회현동 남산옛길’을 조성했다. 회현역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소파로와 소공로 사이의 골목길 일대로,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소박하고 정겨운 곳이다. 메인인 제1코스는 회현동 입구 은행나무 쪽에서부터 회현동 시범아파트에 이르는 560m 구간이다.

회현동의 상징인 은행나무는 조선 시대 12정승을 배출했다는 마을의 보호수로, 도심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아온 영험 있는 나무다. 제2코스는 지하철역 입구에서부터 회현동 주민센터를 거쳐 시범아파트로 이어지는 430m 길이다. 도보 여행자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면서 회현동 중심을 관통하는 길이다.

‘회현동 남산옛길’에서 꼭 만나게 되는, 아니 만나야 하는 회현동의 랜드마크가 있다. 바로 회현 시범아파트다. 1970년에 세운 우리나라 제1세대 아파트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파트다. 그 당시 입주금은 30만 원이었다고 한다. 쌀 한 가마니가 5,000원, 연탄 한 장이 16원, 담배 한 갑이 60원 할 시기였으니 가난한 원주민에게는 벅찬 금액이었다. 결국 고위 공무원과 경찰, 연예인 등 중산층이 새 주인이 됐고 돈 없는 원주민은 이들에게 밀려 다른 달동네를 찾아 떠나야 했다. 나중에 강남과 여의도에 진짜 ‘시범아파트’가 여러 곳 건립돼 중산층이 이사를 간 뒤에야 서민들은 다시 이 아파트의 주민이 될 수 있었고, 그 후 30년 이상 서민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철거, 혹은 보수 후 재활용을 논의하는 대상이 됐다.

1970년에 지은 우리나라 제1세대 아파트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회현 시범아파트. 독특한 구조와 역사를 지닌 서울의 특별한 도시 유산 (중구 퇴계로 8길 101)

1970년에 지은 우리나라 제1세대 아파트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회현 시범아파트. 독특한 구조와 역사를 지닌 서울의 특별한 도시 유산 (중구 퇴계로 8길 101)

회현 시범아파트는 지난 2004년 정밀 진단에서 안전 등급 D 등급을 받아 재난 위험 시설에 포함됐다. 하지만 당시 안전 진단을 자문한 전문가는 건물 전체의 구조적 안전성에는 큰 문제가 없어 내진 보강과 보수 작업 후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에 서울시는 철거를 할지, 서울의 특별한 도시 유산으로 남겨놓을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시범아파트를 뒤로하고 남산공원에 올랐다. 따스한 햇볕이 비치는 날, 조금 가벼운 옷차림으로 남대문과 회현동을 찾아보자. 시끌벅적한 시장과 골목골목이 정겹고 조용한 동네. 전혀 다를 것 같지만 묘하게 닮은 두 동네를 걷다 보면 성큼 다가온 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얼굴에도 봄 햇살처럼 화사한 웃음꽃이 피기를 기대해본다.

■ 남대문시장과 회현동의 보물

남산공원 회현지구

케이블카로 슝~ ‘남산공원 회현지구’
남산에 오르는 길은 남대문, 퇴계로, 장충공원 등 여러 경로가 있다. 회현동 쪽 순환도로 변에는 팔각정과 연결되는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어 편하게 남산에 닿을 수 있다. 과학교육원과 남산도서관, 안중근의사기념관도 가깝다. (위치 : 중구 삼일대로 231)

회현동 은행나무

소원 빌면 이뤄져요 ‘회현동 은행나무’
519세. 전설에 따르면 조선 전기 문신 정광필의 꿈에 신이 나타나 “서대(犀帶) 12개를 은행나무에 걸게 되리라”라고 했다. 서대는 종1품 이상의 관복 허리에만 착용할 수 있는 띠. 그 후 실제로 이 터에서 12정승이 배출됐다고 전해진다. (위치 : 중구 퇴계로 우리은행 본점 앞)

갈치 골목과 칼국수 골목

말해 뭣해! ‘갈치 골목과 칼국수 골목’
남대문시장의 대표 명소, 갈치 골목은 1980년대 값싼 갈치를 조려 내놓은 것이 입소문을 타 유명해졌다. 중앙식당, 희락식당이 유명하다. 칼국수 골목에는 칼국수 가게 열 곳이 오밀조밀 붙어 있다. 즉석에서 국수를 썰어 끓여준다. 찰밥, 보리밥도 인기가 많다. (위치 : 중구 남대문시장4길 21)

남대문교회

제중원 부속 교회 ‘남대문교회’
1885년 선교사 앨런이 한국에서 처음 예배를 드린 곳이다. 제중원의 부속 교회인 ‘제중원교회’로 시작했다.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이지만 아쉽게도 메트로타워와 서울스퀘어빌딩 사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서울역 고가에 보행로가 신설되면 산책하면서 쉽게 볼 수 있을 듯. (위치 : 중구 퇴계로 6)

우리은행 박물관

은행의 역사를 한눈에 ‘우리은행 박물관’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지하 1층에 있다. 고려 시대 개성 상인들이 창안한 우리나라 고유의 장부 정리 방법인 송도사개치부법에 따라 정리한 일기,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 설립 청원서 등 희귀 사료 200여 점과 전 세계에서 수집한 저금통 500여 개가 전시돼 있다. (위치 : 중구 소공로 51)

회현지하쇼핑센터

세대를 초월한 매력에 흠뻑 ‘회현지하쇼핑센터’
회현지하쇼핑센터는 중고 LP 마니아들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15개 점포가 성업 중이며 아날로그적 매력에 빠진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회현지하쇼핑센터에는 이 외에도 중고 오디오, 필름 카메라, 우표, 주화 등 각종 수집 상점이 밀집해 있다. (위치 : 중구 소공로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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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서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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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서울사랑 생산일 2016-04-12
관리번호 D0000025812670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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