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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는 대상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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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컬처 톡’ 113

한국의 잡지 화보가 외국에서 화제가 됐다. 맥심 코리아가 발간하는 맥심이라는 남성잡지 9월호 표지 화보에 대해, 영국의 코스모폴리탄 지가 ‘역사상 최악의 표지’라고 지적한 데에 이어 미국의 맥심 본사도 ‘심히 우려스럽다 ... 강력한 언어로 규탄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맥심 코리아 측은 결국 사과문을 발표하고 문제 잡지의 전량 수거 및 폐기를 약속했다. 일개 성인잡지 화보가 나라망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맥심 9월호 표지 화보는 공개되자마자 국내에서 비판에 직면했었다. 악역으로 많이 등장하는 배우 김병옥이 폭력배 느낌의 옷을 입고 허공을 응시하며 옆 그랜저 차량에 한 손을 얹은 모습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찍은 사진이었다. 그랜저 트렁크에선 청테이프로 결박된 여성의 맨다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인터넷에서 논란이 일어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표지화보와 잡지 속 사진들은 여성에 대한 중대 범죄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는데 맥심 코리아 측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한국 간행물윤리위원회도 이 화보에 대해 청소년 유해물이 아니라는 심의 판정을 내렸다. 그러다 외국에서 ‘역사상 최악의 표지’, ‘규탄한다’ 등의 지적이 나오자 그제서야 맥심 코리아 측이 사과하게 된 것이다. 화보의 윤리성조차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외국의 시각에 의존하는 우리 시스템의 민낯이 드러났다.

처음 논란이 됐을 때 맥심 코리아 측은 ‘느와르 영화처럼 표현된 것이고, 성범죄를 표현하진 않았다’라고 해명했다. 간행물윤리위원회 측 관계자도 비슷한 논리를 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당시 일각에선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맥심 화보를 옹호하기도 했다.

영화와 화보를 비교한 것부터가 잘못됐다. 영화엔 기승전결 스토리가 있지만 화보는 이미지 그 자체로 말한다. 또 영화는 선택한 사람들만 극장에 들어가서 보는 것이지만 표지 화보는 서점 진열대에서 무차별적으로 노출된다. 문제의 화보는 소유물에 한 손을 얹은 남성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찍은 것으로, 전형적인 ‘성공한 남성’ 코드의 사진이다. 그가 소유한 차 안에 들어있는 여성도 그 남성의 포획물, 남성의 성공을 증명하는 소유물이라는 의미가 발생한다. 게다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주로 자극하는 잡지에 특성상, 여성을 폭력적으로 결박하는 행위가 성적 판타지의 일종으로 제시되는 문제도 있다. 이것은 남성에겐 그릇된 선망을, 여성에겐 공포를 조장할 수 있는 사진이었다.

성범죄 묘사가 아니라는 해명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여성이 바지와 신발을 착용했다면 성범죄가 아닌 단순폭력(?) 설정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맨다리가 드러난 것은 명백히 성적 암시가 깔려있는 것이었다. 즉, 여성 납치, 성폭력, 살해, 사체 유기로 이어지는 범죄를 일종의 남성 판타지로 내세우는 성격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 사회에선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선진국에선 문화적 표현에 관대한데, 편협한 우리만 이런 화보까지 매도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가장 발달했다는 영국과 미국의 잡지들이 맥심 화보를 보고 기겁하며 규탄했다. 그 누구보다도 표현의 자유를 중시할 사람들이 말이다. 그러자 겨우 옹호론이 사라지며 이 화보에 대한 논란이 잦아드는 분위기다.

선진국이라고 표현의 자유를 무조건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인륜을 저버리고, 시민공화국의 기본 가치를 저버리며, 약자를 조롱하는 내용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할 부문은 권력자, 부자에 대한 표현이다. 정치적 발언도 최대한 보호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정작 이런 부문에선 표현의 자유가 약하다. 반대로 약자를 향한 표현은 과도하게 자유를 누린다. 이번 화보는 범죄에 희생되는 여성에 대한 표현이었다. 이런 것까지 보호해줄 이유는 없다. 공화국에서 진정 보호돼야 할 표현이 어떤 것인지, 어떤 표현을 용납해선 안 되는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맥심 화보 사태가 우리 사회에 남긴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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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는 대상의 범위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하재근(문화평론가) 생산일 2015-09-08
관리번호 D0000023483294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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