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서울

[서울이야기] ⑥ 음식보다 맛있는 서울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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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서울, 서울 브랜드 이야기] 서울시가 도시브랜드 개발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시민토크콘서트 <우리의 서울이야기>를 지난 2월 27일부터 오는 5월까지 개최합니다. 서울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시민들과 분야별로 살펴보고 이를 통해 서울의 핵심 정체성을 도출한다는 취지로 서울의 산 과 강, 수도, 만남, 시장, 노래, 맛, 문화, 거리, 서울 속의 세계 등 10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이 토크 콘서트에 이코노믹 리뷰 기자가 직접 참석해 우리가 몰랐던, 그러나 알고 싶었던 ‘서울 브랜드’의 이야기를 지상중계 합니다.

[우리의 서울이야기 제6화] 서울, 맛을 이야기하다

지난 4월 3일 저녁, 서울시민청 태평홀은 <시민 토크콘서트, 우리의 서울이야기>에 참여하는 시민들로 북적였다. 콘서트에는 서울도시브랜드추진위원회 위원 및 관계자들과 서울시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신청한 서울 시민들, ‘서울얼굴가꿈단’ 단원들이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제6회 서울이야기 진행 현장

제6회 서울이야기 진행 현장

제6회 서울이야기는 서울의 대표 음식에 담긴 이야기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 했다. 서양 격언에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의 총합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음식 문화 안에 한 사람이 살고 생각하는 방식이 녹아 있다는 뜻이다. 이번 강연에는 서울 음식에 담긴 서울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의 ‘맛’을 이야기해 줄 연사는 여행작가 이자 음식평론가 박정배 씨 였다. 박정배 평론가는 남해 죽방렴의 멸치와 삼천포의 쥐치 같은 비린내 나는 날것들을 먹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돼지고기, 쇠고기 등 기름진 음식을 접했고 음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 시절 처음으로 평양냉면을 비롯한 북한음식을 맛보며 우리 음식의 다양성에 눈을 떴다. 방송 프로듀서, 출판사 대표, 애니메이션 제작사 대표 등 다양한 문화계 일을 해왔다. 대표 저서로 <음식강산>, <사케 입문>, 등이 있다.

한양의 ‘봉송’, 19세기 ‘외식’으로 등장

서울은 조선과 대한제국 시절에는 한양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으로 불렸지만 국가가 바뀌면서도 수도의 자리를 잃지 않은 거의 유일한 도시다. 한양은 왕조의 수도였던 탓에 전국의 물산이 모여들었고 왕족, 관리와 군인 중인들과 상인들이 모여 살았다.

박정배 평론가 강연 모습

박정배 평론가 강연 모습

박 평론가는 “인구가 만 명이 넘지 않으면 외식이 발전하기 힘들다. 조선은 농업국가 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한양만 외식이 발전하게 됐다”며 왕가를 정점으로 한 음식문화 봉송(封送)을 소개했다. 봉송은 조선시대 외식 문화로 왕가의 결혼은 주로 양반과 이루어져 왕가의 음식 비법을 토대로 자연스럽게 서민들에게 까지 전파 되었다. 박 평론가는 “특히 ‘추두부탕’은 한양의 반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음식이다. 난로회(세시잡기), 창의문밖 두부(도문대작), 한강의 복어(서거정), 남주북병(동국세시기)같은 별식들을 먹기도 했다”며 한양의 인기 음식을 소개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농촌경제 시스템이 조금씩 변화면서 한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상공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박 평론가는 “계획도시 한양 도성 안에는 왕가를 위한 내포서외에는 기본적으로 농사기반이 없어서 식재료를 타 지역에서 수급해왔다. 야채는 동대문 밖에서 쌀과 생선 새우젓 같은 기본 식량 재료는 주로 한강을 통해 전해졌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지리지인 ‘동국여지비고’ 한성부전야에 의하면 '동대문 밖에서는 무 배추, 미나리 서대문 밖에서는 가지, 오이, 파, 마늘, 고추, 호박, 남대문 밖에서는 호박, 수박, 토란, 한강 남쪽 송파 탄천 양재 일대에서는 오이, 호박, 무, 배추, 파, 가지, 구파발 부근에서는 시금치, 쑥갓, 상치 등이 재배됐다.

이에 전국의 물산이 모이는 마포의 경상상인들은 세력이 막강해졌고 남대문안의 선혜청과 남대문 밖의 칠패시장은 생선과 마포에서 올라온 물건들을 거래하는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외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한건 19세기 말 이었다. 박 평론가는 “조선인의 외식은 주로 탕반(湯飯)이었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 사람들이 지금의 명동일대에 1885년 일본인들이 남산과 충무로 주변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울의 외식은 한식과 일식 중식에 일본을 거쳐 들어왔으며 러시아, 프랑스, 영국의 서양음식이 혼재된 역사상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했다”라고 설명했다.

조선의 음식문화 근간은 ‘24절기’ 그리고 ‘양념’

조선은 유교와 농업의 사회였다. 농사에 필요한 계절의 변화를 구분해 놓은 24절기는 조선사회의 근간이 되는 시간 계산법이었다. 절기에 맞는 시식(時食) 음식들은 한양에 중요한 음식 문화의 근간이 됐다.

제6회 서울이야기 현장 모습

제6회 서울이야기 현장 모습

정혜경·안정혜 <서울의 음식문화>에 보면 서울의 음식문화의 특징을 다섯 가지 들고 있다.

첫째, 서울의 음식은 고급인 문화다. 조리법이 복잡하고 다양하다. / 둘째, 서울 음식은 한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탓에 짜지도 맵지도 않고 담백하다. / 셋째, 유교적 이념을 받아들여 의례음식과 절기음식이 발달했다. / 넷째, 조리법이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간다. / 다섯째, 조리과정을 거치면서 식품자체의 맛을 제거한다.

한식이 가장 서양과 다른점은 ‘양념’의 활용이다. 일본의 음식은 재료 본연의 맛을 중요시 여겼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일본식을 천하게 여겼다. 박 평론는 “당시 ‘방자구이’라는 음식이 있었다. 하층민이던 방자들이 구워먹던 고기를 뜻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스테이크다. 당시 조선 궁중요리사는 ‘서양놈들은 방자처럼 고기를 먹는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음식은 양념이 복잡하고 다양한 음식을 먹는 게 특징이었다. 남쪽은 계절이 더운 편이어서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해 소금을 많이 쳤다.

박 평론가는 “당시 음식 중에는 콩이 많아 청국장이 유명했다. 봄에는 쑥을 활용한 쑥떡, 쑥탕 등을 즐겨 먹었으며 겨울에는 병을 많이 먹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서울 외식사의 첫 장식 ‘설렁탕’의 등장

미리 지어 논 밥에 방금 끓인 뜨거운 국물을 얹어주는 장국밥은 한국인의 본격적인 외식사의 첫 장을 장식한다.

박 평론가는 “설렁탕 하면 서울이 따라 붙는다. 이만큼 설렁탕은 서울의 명물이다. 또 한국인에게 가장 이상적인 음식은 ‘고깃국’에 ‘쌀밥’이 아닌가. 1920년대부터 설렁탕은 한국사람의 식탁을 떠난 적 없다”고 설명했다.

설렁탕

설렁탕

1898년 9월 4일자 ‘독립신문’에는 ‘쟝국밥과 셜넝탕으로 대접하더라’는 구절이 나온다. 설렁탕은 서민들의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는 양반들도 즐겨 먹은 것은 물론 ‘대접용’ 음식으로 쓰일 정도로 서울 사람들이 좋아한 음식이었다.

설렁탕의 전성기는 일제강점기였다. 1920년 서울 안팎에 25군데(1920년 10월 8일자 매일신보) 정도였던 설렁탕집은 1924년 100곳(1924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경성부 재무당국 조사)으로 급격하게 늘어난다. 당시 종로와 청계천 주변은 설렁탕집들로 빼곡했다. ‘민중의 요구가 다비하고 조선사람의 식성에 적합한 설렁탕은 실로 조선음식계의 패왕(1924년 10월 2일자 매일신보)’이 된다.

박 평론가는 “설렁탕 집이 급증하게 된 원인은 일본군의 고기 섭취량으로 꼽을 수 있다. 1924년 조선은 농사를 위해 소를 함부로 잡지 못하는 농업 국가였다. 그러나 군인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엄청난 양의 고기(1907년 일본군 병사들의 1인당 식육소비량은 22근으로 일반인의 1.3근에 20배에 가까웠다)를 소비했고 한반도의 소들은 일본 군인들을 위한 쇠고기 통조림으로 만들어졌다. 살코기는 통조림으로 만들고 소머리와 내장, 뼈, 꼬리 등이 남았다. 일본인들은 이런 부속물들을 먹지 않았다. 소머리와 내장 뼈들은 설렁탕을 만드는 주재료들이다. 저렴한 가격에 남아도는 소의 부속물들로 인해 설렁탕은 서울의 대표적인 외식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며 설렁탕의 근원을 설명했다.

국민 외식 메뉴 ‘갈비’ 그리고 ‘가든 공화국’

소의 부산물 중에는 갈비뼈도 있었다. 갈비에 붙은 살코기를 한국인들은 알뜰하게 발라 먹었다. 1920년대 중반 만주로 가는 전진기지이자 공업 지역이던 평양을 중심으로 갈비를 구워먹는 문화가 번성하기 시작했고 평양에서 시작된 갈비문화는 서울로 이어졌다.

삼원가든

삼원가든

해방 이후 서울에 갈비문화가 본격화 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해운대 암소갈비가 부산을 거쳐 서울에 상륙한다. 해운대식 암소갈비는 파 겉절이에 양념을 한 암소갈비를 구워 먹는 문화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사회는 생존의 먹거리 시대를 벗어나 미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박 평론가는 “갈비의 인기에는 ‘삼원가든’이 있었다. 1981년 11월 1,200평으로 신사동에 개업한 삼원가든은 강남 한 복판에서 전원의 분위기와 갈비를 먹을 수 있는 공간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53년 5월 2일자 동아일보에 보면 하루 찾아오는 손님은 평일에는 2백여 명 휴일에는 350여명 정도 하루 소비하는 갈비만도 10~13짝 가량이니까 하루에 5, 6마리의 소가 소비되는 인기 명소였다”고 설명했다.

삼원가든의 성공은 강남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됐고 가든형 갈빗집은 강남을 기반으로 서울 외곽과 지방으로 번져 나갔다. 1980년대 말에는 가든 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갈비는 전 국민적인 외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육고기 ‘삼겹살’

박 평론가는 “1931년에 쓰인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 6판에는 '세겹살(뱃바지) 배에 잇는 고기(돈육 중에 제일 맛 잇는 고기)'는 삼겹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나온다”며 “<조선요리제법>에는 돼지를 이용한 조리법으로 ‘저육구의’(猪灸), ‘제육편육’이 등장하지만 지금처럼 양념을 안하고 불에 직접 구워 먹는 음식은 아니었다. 1940년에 홍선표가 지은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에도 세겹살은 ‘가장 맛 좋은 부위’라고 나온다. 평양이 소로 이름을 날렸다면 개성은 돼지가 유명했다”고 삼겹살에 대해 설명했다.

삼겹살

삼겹살

1960년대 초 중반에는 살아있는 돼지나 냉동 돼지를 수출했지만 돼지 부산물의 수요가 없던 일본의 요구로 1968년부터는 머리와 내장을 제외한 2분도체로, 1969년부터는 다시 부분육으로 변경됐다. 1971년 일본에서 돼지고기를 수입자유품목으로 지정하자 우리나라의 대일 수출은 더욱 활발해져 몇 백만 톤 수준이던 돼지고기 수출이 1972년에는 3,800톤, 1976년에는 4,500여 톤으로 급증하게 됐다.

박 평론가에 의하면 이때 수출이 불가능한 돼지머리, 내장, 다리, 뼈 등이 남아돌자 대도시에 모여들었던 빈민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돼지고기 특수부위 수요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1975년이 되자 대한민국의 GNP는 500불을 돌파했다.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500불은 육식이 본격화되는 임계점이다. 이후 육고기의 수요는 폭발했다. 축협 중앙회의 조사에 의하면 1981년까지만 하더라도 돼지살코기(56.7%)보다 삼겹살(39%)의 선호도는 떨어졌다. 기름기가 많고 가격이 싼 삼겹살은 도시 노동자들을 위한 외식이었다.

1990년대 중반 냉장유통체제가 본격화되기 전에 상할 염려가 있던 돼지고기는 바싹 구워 먹어야 하는 음식이었다. 냉동삼겹살을 대패처럼 썰어 먹는 대패삼겹살도 이때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삼겹살은 IMF를 거치면서 국민 육 고기로 등극했다. 2007년이 되면 삼겹살은 85.5%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돼지고기 선호 부위(2007년 5월 7일 서울신문)가 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제주산 오겹살이 서울에 등장한다. 기존 삼겹살은 비계를 제거한 채로 삼겹살을 제공했지만 제주산 돼지는 비계를 그대로 붙여 오겹살로 불렸다. 제주의 돼지는 비계가 단단하고 단맛이 난다. 제주 사람들은 뼈를 제외한 돼지의 모든 부위를 먹는다.

박 평론가에 의하면 지금의 삼겹살도 개성산 삼층제육의 비육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방을 만들어내는 사료와 근육을 만들어내는 사료를 차례로 먹이는 '교차 사료' 방식을 도입해서 만든다. 박 평론가는 “세 겹으로 층을 이룬 삼겹살은 한국인의 비육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외국의 축산업계는 한국식 삼겹살을 만들기 위해 비육의 노하우를 전수 받아 한국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전 세계 삼겹살은 전부 한국으로 모인다는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소고기 무국같은 서울의 맛, 그 속에 담긴 문화도 즐겨야

박 평론가의 강연이 끝난 후 시민들과 함께하는 ‘집중 토크’ 시간이 이어졌다. 이 시간에는 시민들이 전문가와 어우러져 함께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서울의 대표음식은

진행자 이제이 교수의 진행으로 시민들과 함께하는 대화 시간은 시작됐다. ‘어떤 음식을 서울의 대표 음식’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시민들은 ‘명동칼국수, 삼겹살, 피맛골의 녹두전과 굴전, 바지락 칼국수, 신당동 떡볶이’ 등을 말했다.

한 시민은 “보통 수술하거나 크게 앓고 나면 개고기가 진짜 몸에 좋은지 궁금하다”며 박 평론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에 박 평론가는 “당시에는 단백질을 공급하는 고기, 고깃국물이 귀했다. 그래서 수술과 같이 크게 앓고 나면 흔히들 고깃국물을 먹었던 것. 그 당시와 지금은 상황도 많이 다르고, 의학적으로 과가 있다고 장담 할 수 는 없다. 돼지는 인간과 음식을 경쟁한다. 즉, 먹는 게 같다는 말이다. 옛 사람들은 겨울에 먹을 게 없으니 돼지를 먹었고 개는 복날에 많이 먹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개를 먹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육개장에 개대신 소고기를 넣어먹었다. 사실 개고기는 도축법이 아예 없다. 그런 의미이서 개고기를 먹는건 모두 불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마지막으로 박 평론가는 자신이 느끼는 서울의 맛을 ‘소고기 무국’에 비유했다.

그는 “내가 어렸을 때 가장 맛없다고 느낀 게 소고기 무국 이었다. 하지만 자꾸 먹다보니 한번 맛에 빠지면 헤어 나오질 못하겠더라. 무와 고기가 함께 어우러져 은근하게 끓여진 맛이 일품이다. 건강하고 심심하고 무던한 맛 이것이 서울의 맛이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나는 개인적으로 외국에 나가서도 한국 음식만 고집하는 사람이 싫다. 그 나라의 맛에는 문화가 묻어나 있다. 우리 음식도 재료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뿜어내는 맛과 이야기 그리고 문화가 있다. 그것에 더 귀 기울이면 음식의 맛이 더 풍부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전했다.

출처 : 이코노믹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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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내 손안에 서울 생산일 201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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