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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혁명 '4·19혁명'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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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주년 맞은 4·19혁명과 국립 4·19 민주묘지 방문
국립 4.19 민주묘지 입구
국립 4.19 민주묘지 입구 ⓒ조수연

미국 제3대 대통령인 토마스 재퍼슨은 민주주의에 대해 “자유의 나무는 때마다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써 거듭나야 한다(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로 많이 인용돼 왔는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정말 많은 사람의 피와 희생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 4월 19일, 1980년 5월 18일, 1987년 6월 등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많은 사람이 희생됐고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투옥돼 고문을 받거나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국립 4.19 민주묘지 안내게시판
국립 4.19 민주묘지 안내게시판 ⓒ조수연

‘4·19혁명의 불꽃’ 부정선거로 폭발한 민심

서울에서는 대표적으로 4월 19일, 4·19혁명이 있다. 4·19혁명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앞서 일어났던 3·15 부정선거를 살펴봐야 한다. 1960년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정부통령 선거가 있던 해였다. 1956년 직전 선거에서 진보당의 조봉암이 선전하자, 위기감을 느꼈던 자유당은 대규모의 부정선거를 조직했다.

지금은 선거의 4대 원칙(보통, 평등, 직접, 비밀)이 보장돼 있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선거인명부를 조작하거나 미리 자유당 당적으로 출마한 이승만, 이기붕의 표를 찍거나, 3명 혹은 5명씩 묶어 선거하도록 했다. 만연했던 부정선거로 인해 직전 선거에서 이기붕을 꺾었던 장면이 부통령에서 떨어지고,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됐다.
민주묘지에 안장된 민주영령들
민주묘지에 안장된 민주영령들 ⓒ조수연

당시 마산에서는 부정선거를 가만히 볼 수 없었다. 부정선거에 분노한 시민은 투표장 밖으로 나왔고, 민주주의를 외쳤다. 3·15 부정선거에서 민심이 폭발한 셈이다. 시민은 경찰서와 자유당 당사를 공격했고, 이승만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한다.

당시 마산상고에 재학 중인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시민은 폭발했고, 마산의 소식은 전국으로 빠르게 퍼졌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도심에서 시위를 했다. 문제는 정치깡패. 정치깡패들은 고려대 학생들을 습격했고, 수많은 학생이 부상을 입었다. ‘대학생’이 폭력에 의해 쓰러지니, 서울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날이 4월 19일이다.
묘지 뒤에는 기념탑이 있다.
묘지 뒤에는 기념탑이 있다. ⓒ조수연

4·19혁명은 대학생과 고등학생에 이어, 초등학생까지 시위에 참여했고, 대학교수들도 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며 시위했다. 대학교수까지 참여했던 시위로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4·19는 혁명으로 끝났다.

4·19 일주일 앞두고 가본 ‘국립 4·19 민주묘지’

4·19혁명의 희생자를 기리고, 4·19혁명의 의의와 민주주의의 역사를 알려주는 곳이 서울에 있다. 바로 강북구 수유동 일대에 위치한 ‘국립 4·19 민주묘지’다. 국립 4·19 민주묘지는 유영봉안소와 묘역, 4월 학생혁명 기념탑, 참배로, 상징문, 기념관 등을 골자로 1993년 10월 20일 국립묘지화 공사에 착수해 1995년 4·19혁명 35주년에 문을 열었다.
사월 학생혁명 기념탑
사월 학생혁명 기념탑 ⓒ조수연

기념관은 현재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휴관 중이다. 바로 참배로를 걸며 4월 학생혁명 기념탑을 찾았다. 4월 학생혁명기념탑은 국립 4·19 민주묘지에 정중앙에 있는데, 4월 학생혁명 기념탑 앞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적혀있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 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6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는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민주영령의 묘
민주영령의 묘 ⓒ조수연

4월 학생혁명 기념탑 앞에서 묵념을 마치고, 묘비를 천천히 살폈다. 4월 19일을 일주일 앞두고 방문한 터였다. 태극기 앞에 서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한 이들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4·19혁명은 광복 후 최초의 시민혁명이자 오늘날 민주주의의 씨앗이 된 역사적 사건이다. 4월,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역사를 알려주는 국립 4·19 민주묘지를 찾아 4·19혁명의 희생자를 기리고, 덕분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음에 감사 인사를 올려보는 건 어떨까.
민주영령 덕분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민주영령 덕분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조수연

■ 국립 4?19 민주묘지

○ 위치 : 서울시 강북구 4?19로 8길 17
홈페이지
※ 4?19 혁명기념관은 코로나19로 인해 잠정 휴관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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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혁명 '4·19혁명'을 찾아서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조수연 생산일 2021-04-19
관리번호 D0000042383359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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