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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용서하는 과정에 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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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작가 김유경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7)

용서 :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우리는 쉽게 ‘용서’를 말한다. 추악하고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선 절대로 용서해선 안 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론 역사적인 국가적 범죄를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발뺌을 하거나 축소 왜곡하면서 유감을 표하며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선 이제 그만 용서해야 하는 거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용서를 하는 피해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함부로 ‘이 정도면 용서해야 마땅하다’고 강요하거나, ‘왜 이런 놈을 용서해주나?’라며 비난할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 할아버지의 가슴 아픈 ‘용서’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어느 날, 퇴근해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일가족이 모두 살해된 채 발견됐다. 노모와 아내, 그리고 4대 독자인 아들이었다. 몇 달 동안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살면서 누구에게 원한 산 일도 없었고, 누가 왜 가족을 살해했는지 이유도 단서도, 목격자도 없었다. 졸지에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그는 살인범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일 자살 충동을 느끼며 살아있어도 산 것 같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강 다리에까지 찾아갔던 그는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살인범만 잡히고 나면, 그 때 자신도 모든 삶을 접고 가족들을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지옥 같은 시간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달 만에 범인이 잡혔다. 그는 희대의 연쇄살인범이었다. 살해 이유는 없었다. 그야말로 싸이코패스의 묻지마 살인이었다. 살인범이 밝혀진 뒤에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지옥이었다. 아무리 분노하고 증오해도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 절망하게 했다. 이대로 치유의 길은 멀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새벽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찾아들어간 성당에서 비로소 작은 위안을 얻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 종교에 의지하면서 그가 떠올린 것이 바로 ‘용서’였다.

“내 가족을 죽인 살인범을 사형시킨다고 해서 어머니와 아내가 그리고 자식이 살아 돌아오는 게 아니잖아요. 복수한다고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이 고통은 죽는 날까지 계속될 거니까요.”

‘용서’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그는 일상을 찾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용서’하기까지 거쳐 왔던 힘겨운 시간과 숱한 고민의 과정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집간 딸들조차도 아버지가 왜 살인범을 용서하냐고 화를 냈다. 세상 사람들도 대부분 그러했다. 그가 ‘용서’를 마음에 품게 되면서 자살충동에서 벗어났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지옥의 시간들에서 탈출했으며 비로소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공감하려 하지 않았다.

“용서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마음속에서 가끔씩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너무 괴로워요. 지금도 살인범이 눈앞에 있으면 멱살을 잡고 왜 내 가족을 죽였느냐고 너도 한번 똑같이 내 손에 죽어 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엔 그 마음이 전부였다면 지금은 아주 일부분이에요. 아직도 용서를 한 게 아닙니다. 그냥 용서하는 과정에 있는 거지요. 평생토록 가야할 길인 것 같아요.”

그를 알게 되고,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가 걸어왔던 용서와 치유의 과정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용서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함부로 가타부타 얘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용서’는 먼 길 끝에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품어온 상처와 고통과 번민의 시간들을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용서’를 두고 입방아를 찧고 어떤 이들은 행동으로 보여준다. ‘좋은 말로 할 때 이제 그만 용서해!’, 혹은 ‘당신이 뭔데 살인범을 용서해?’

참 무례한 말이고, 참 무례한 행동이다. 그러기 전에 적어도 한 번쯤은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과 치유에 대해 조금이라도 헤아리려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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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용서하는 과정에 있는 거지요"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최경 생산일 2016-01-07
관리번호 D0000041753623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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