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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간디 ‘함석헌’이 7년간 머물던 쌍문동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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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봉구 쌍문동에는 인권 운동가이자 교육자, 사상가, 문필가로 활동한 함석헌(1901~1989) 선생을 기리는 ‘함석헌 기념관’이 있다.
선생이 7년 동안 거주했던 가옥으로 생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원형 보존하여 리모델링한?기념관이다.?선생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면서 그를 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이곳은 도봉구 도봉문화재단에서 관리 중이다. 윤채원 실장의 친절한 안내로 기념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관람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평생 독립운동, 민주화, 인권운동에 헌신한 함석헌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도봉구에서 2013년부터 유족과 기념사업회와 수차례 협의를 거쳐 추진하게 되었다.
같은 해 주민참여 예산사업으로 선정되면서 서울시에서 예산을 지원받아 사업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 용역을 거쳐 2014년 9월 구조변경공사로 착공 2015년 9월 준공과 함께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개관되었다.
함석헌 선생 그분은 누구인가? 선생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하여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고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귀국하여 오산 학교와 송산 학원 등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왕성한 집필 활동을 벌였다. 광복 후에는 신의주 반공 학생 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6·25 한국전쟁 중 월남했다.
선생은 성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씨알 사상’이라는 비폭력·민주·평화 이념을 제창하면서 ‘한국의 간디’라고 불렸다.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1979년과 1985년 두 번의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했다. 1970년 4월에는 시사평론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1987년에 제1회 인촌상(동아일보사)을 수여받았고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으로서 ‘서울평화선언’을 제창했다. 활발한 활동 중 건강 악화로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병원에서 별세했다. 그 후 ‘이달의 문화인물’(문화관광부)과 독립 유공자로 선정되었으며 묘소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329호에 안장되었다.
함석헌 기념관은 연면적 248.67㎡로 지하 1층과 지상 1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은 선생이 생활하셨던 곳으로, 사용하시던 서안(옛 선비의 책상)과 방에 걸린 간디의 사진 및 소장했던 책과 저서, 생활용품 등의 유품을 비롯해 선생의 육성이 담긴 강의 테이프와 동영상 관람이 가능한 전시실 2곳으로 구성돼 있다.?
창고로 사용했던 지하 1층은 주민들이 소규모 세미나와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는 세미나실 겸 게스트 룸과 도서열람실 등이 있다.
그리고 연천군 전곡면 함석헌 묘비가 보관된 앞마당과 식물을 가꾸었던 유리 온실에는 수첩과 메모지, 직접 만드신 화분, 사용하시던 모자와 장갑 등의 생활용품을 만날 수 있다. 이 두 곳 모두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표 저서도 만날 수 있고 선생이 생전에 가꾸셨던 나무와 온실의 화초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방문이나 이용안내는 함석헌 기념관 홈페이지로 접속하거나 도봉구청 문화체육과(02-2091-2263) 또는 함석헌 기념관(02-905-7007)으로 문의하면 된다.
■ 함석헌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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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 시민기자 박칠성 | 생산일 | 2019-0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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