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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 속 생생한 역사현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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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호수 주변에 자리한 `삼전도비`ⓒ방윤희

석촌호수 주변에 자리한 `삼전도비`

영화 <남한산성> 속 여운을 담은 채, 삼전도비가 위치한 송파구 잠실로를 찾았다. 잠실광역환승센터 2번 출구에서 20m를 앞에 두고 삼전도비를 만날 수 있었다. 도시의 대로변과 석촌호수를 옆에 두고 있는 삼전도비와의 첫 만남은, 영화만큼이나 생생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결국 1637년 청나라의 군대가 머무는 한강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의 요구로 1639년(인조17) 12월에 세운 비석이 ‘삼전도비’이다.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지만 1963년 문화재 지정 당시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 지었다. 한강의 물길이 닿는 나루터였던 삼전도는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1970년대 이후 한강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비석의 원래 자리는 현재의 석촌호수 서호 내부에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3년 석촌동 아름어린이공원 내에 세워졌다가 2010년 원 위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야 한다는 중론에 따라 현재의 자리인 이곳 석촌호수 주변에 옮겨졌다.

대리석 계통의 돌로 만들어진 삼전도비의 앞면. 왼쪽은 몽골글자, 오른쪽은 만주어가 새겨져 있다. ⓒ방윤희

대리석 계통의 돌로 만들어진 삼전도비의 앞면. 왼쪽은 몽골글자, 오른쪽은 만주어가 새겨져 있다.

비각이 둘린 삼전도비 앞에 이르자 높이 395㎝, 너비 140㎝로 이수(용 모양을 새긴 머릿돌)와 귀부(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받침)를 갖춘 커다란 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부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을 세우고 위에는 이수를 장식했다. 비문은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 때문에 당대의 문장가들이 비문 짓기를 꺼렸으나 부재학 이경석(李景奭)이 불가피한 상황임을 알고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도총관 오준(吳竣)이 썼다. 비문 앞면 왼쪽에는 몽골글자가, 오른쪽에는 만주글자가, 뒷면은 한자가 각각 새겨져 있어 17세기 세 나라의 언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문의 굴욕적인 내용 때문에 1895년(고종32) 고종은 삼전도비를 땅속에 묻게 했으나 일제는 1913년 다시 삼전도비를 세웠고, 1963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난 후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비석 옆에는 몸돌과 이수가 없는 작은 귀부가 하나 남아있는데, 이는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요구 때문에 당초 만들어진 귀부가 필요 없어지면서 남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귀부의 유래를 적은 표석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전해졌다.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삼전도비는 수난과 수차례 이전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치욕의 순간도 역사의 한 부분일 터,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또한 과거가 없다면 미래의 역사를 예측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즉 와봐야지 했던 것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발길이 머물렀다. 원작 김훈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의 힘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보다는 알아야 하는, 알고 싶은 우리의 역사라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한 터였다.

송호정은 송파의 호수라는 의미로, 송파의 유래를 새겨 놓았다. ⓒ방윤희

송호정은 송파의 호수라는 의미로, 송파의 유래를 새겨 놓았다.

삼전도비에서 반대편 잠실광역환승센터 1번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가을이 펼쳐진 잠실호수교를 지나 송호정(松湖亭)에 이르렀다. 송파의 호수라는 의미로 송호정이라 이름 붙인 정자 옆으로 송파나루터 표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남(충청, 영남, 호남) 지방과 서울(漢陽)을 이어주던 조선후기의 나루터.” 표석에 새긴 것처럼 석촌호수는 한성과 삼남 지방의 뱃길을 잇는 송파나루터가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송파진(松坡鎭)의 군영이 있었으며, 송파진의 별장(別將)이 송파나루와 삼전도(三田渡)·동잠실·광진(廣津)·독음(禿音) 등의 나루터를 함께 관할하였다.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와 자동차 교통의 발달로 송파시장이 쇠퇴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나루터의 기능은 1960년대까지 뚝섬과 송파를 잇는 정기선이 운행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강남지역의 개발이 시작되었고, 1970년 송파나루 앞으로 흐르던 한강 본줄기를 매립하고 성동구 신양동 앞의 샛강을 넓혀 한강 본류로 삼았다. 이로써 송파나루는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은 한강을 메우다 남긴 석촌호수에서 겨우 그 흔적만을 짐작할 수 있다.

송호정 옆으로 송파나루터 표석이 자리 잡고 있다. ⓒ방윤희

송호정 옆으로 송파나루터 표석이 자리 잡고 있다.

영화 속에 송파강, 나루터 이야기가 나온 터라 송파나루터 표석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영화를 넘어 마치 역사가 살아 꿈틀거리는 듯 했는데, 청태종이 천만대군을 몰고 송파나루를 건너오는 모습을 상상하니 오금이 저리는 것만 같았다. 송파나루터 표석 이외에도 서울 시내 곳곳에서 일상 속 스쳐 지나는 표석을 만나볼 수 있다. 앞으로 표석을 발견하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역사의 현장을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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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책임자) 시민기자 방윤희 생산일 201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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