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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한끼서울] 양평동 된장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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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된장찌개로 유명한 ‘또순이네’

서울에서 된장찌개로 유명한 ‘또순이네’

정동현 맛있는 한끼, 서울 ⑩ 영등포구 또순이네

집에는 나와 된장찌개, 고양이만 있었다.

취업 준비를 하며 '자소서'를 쓰던 대학교 4학년 가을학기는 수업도 별로 없었다. 대신 나 홀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노트북 컴퓨터 한 대를 등산 배낭 같이 큰 가방-실제 등산 배낭이었는지도 모른다-에 넣고 늦게 학교로 출발하는 나날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했던 아르바이트는 경제 현실을 체험하고자 한 경영학도의 현장 실습으로 탈바꿈 했고, 우연히 참가한 봉사활동은 나의 희생정신과 높은 도덕률을 증명하는 기록이 되었다. 설익은 자괴감은 인터넷 사이트 위에 찍힌 ‘합격’과 ‘불합격’ 표시가 반복됨에 따라 희미해졌다.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심정으로 나의 사소한 과거 하나 하나에 의미부여를 했다. 아르바이트도 끊고 이름만 지우면 위인전 같은 ‘자소설’을 쓰며 이력서를 고치고 또 고쳤다.

한 번 매식(買食)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된장찌개 뚝배기로 이른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속편했다. 어머니가 끓여놓은 된장찌개에 들은 내용물들, 감자, 양파, 파 등속은 모두 잘게 잘려 있었다. 출근길에 된장찌개를 끓이느라 1분이라도 빨리 익히기 위한 어머니 노하우였다. 그 된장찌개를 다시 끓이며 나는 계란프라이 두개를 부쳐 단백질을 보충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만 더해지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야말로 밥 먹듯 된장찌개를 먹었다.

외관은 대중식당이지만 그 맛은 유일무이하다. ‘또순이네’만의 깊은 맛을 가진 된장찌개를 내놓는다.

외관은 대중식당이지만 그 맛은 유일무이하다. ‘또순이네’만의 깊은 맛을 가진 된장찌개를 내놓는다.

그러나 이때만큼 된장찌개 맛이 다르게 느껴진 때는 없었다. 된장과 감자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달달하면서도 짙은 흙 맛, 그 위에 올라탄 양파와 호박의 단맛과 청양고추 매운맛, 화장을 하듯 초록 기운을 품은 파가 녹아들어간 된장찌개. 보온밥솥에서 푼 밥에 비벼가며 하루를 시작하던 20대 후반이었다. 아무 것도 쌓인 것 없는 과거 위에 서서 뚜렷하게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미래를 바라보는 흔들리고 또 흔들리던 시절에 나의 배를 채우던 것은 너무나 평범하여 아무런 수식을 찾을 수 없는 된장찌개 뿐이었다.

얼마 후 학교 대신 회사로 향하는 전철에 올라타 새벽에 가까운 출근과 자정에 수렴하는 퇴근으로 불안함을 씻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삼겹살을 구우며 서비스로 나오는 된장찌개에 소주를 마셨다. 속이 부대껴 길거리에 허리를 숙이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들을 흘리는 밤도 잦았다. 차들의 하얀 헤드라이트 불빛, 여전히 화려한 거리의 네온사인, 그리고 입 속에 비릿하게 남은 된장 향내에 아예 주저앉아 버렸던 어떤 밤. 그 수많은 밤이 지나고 나는 나이가 들어 입맛에 맞는 된장찌개가 아니면 손도 대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저녁에는 고기를 반드시 시켜야 한다. 등심과 토시살을 주메뉴로 한다

저녁에는 고기를 반드시 시켜야 한다. 등심과 토시살을 주메뉴로 한다

일요일 저녁, 시내 모든 불이 다 꺼진 한산한 여름 끝자락에도 양평동 ‘또순이네’는 문을 열고 있었다. 시내에서 된장찌개로 이름을 날리는 몇 안 되는 집 중 하나가 바로 이 곳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봄 한철 나는 냉이를 듬뿍 넣은 냉이된장찌개다. 여름이 되면 냉이 대신 부추를 올린다.

'한약재를 넣어 달인 물이니 남기지 말라', '김치를 불판에 올리면 연기가 나니 금지다' 등등 잔소리가 많은 이 집은 오히려 그 잔소리들 덕분에 더 정감이 간다. 연기가 난다며 청하지 않았는데도 불판을 가는 아주머니들은 동작이 빠르고 주문을 놓치는 일이 없다.

점심에는 고기 없이 된장찌개만 주문을 해도 되지만 저녁은 꼭 고기를 시켜야 한다. 고기와 두부 인심이 박하지 않은 이 유명한 된장찌개 일인분이 6,000원 밖에 하지 않으니 점심, 저녁 주문을 달리 받는 것을 야박하다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도축한지 얼마 안 된 싱싱한 등심과 잡내가 나지 않는 토시살을 내놓으니 그 역시 아깝지 않다.

또순이네 식당 내부 모습

또순이네 식당 내부 모습

그러나 이 집 존재 이유는 역시 된장찌개다. 찌개 뚝배기 하나로 빌딩을 올렸다는 말이 나오는 이 집 된장찌개는 밀도부터가 상당하다. 부추와 고추를 듬뿍 쌓아 숯불 위에 자글자글 끓어가며 졸이면 그 맛이 더 증폭된다.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인 이 집 맛과 시판 된장으로 끓인 찌개 맛을 분별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남다름이 분명한 향과 맛은 누구나 구별할 수 있다.

조금 더 화사한 향, 단맛이 덜하고 혀 위에 묵직하게 감도는 장의 소금기, 이것들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자란 채소들과 어울려 내는 맛은 익숙하고 또 거침이 없어 상 앞에 앉은 객들의 숟가락 젓가락 놀림에 오래된 장단을 베이게 한다.

철철 끓는 뚝배기를 맨손으로 잡는 직원들 몸짓과 노구(老軀)를 이끌고 여전히 계산대와 주방을 오고가는 주인장의 작은 몸에는 여전히 기백이 살아있어 여럿을 먹여 살리는 대중식당이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전범(典範)과도 같은 곳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벽에 매달린 액자 안, 십년도 훌쩍 전 주인장의 허리가 꼿꼿하고 얼굴에 주름이 덜한 시절의 빛바랜 사진을 보면 이 된장찌개 뚝배기 한 그릇에 삭혀진 몸과 사라지지 않는 상처가 얼마일 것인가 상상이 되며 조금은 서글퍼졌다.

별 것 없는 것들이다. 결국엔 졸여지고 뭉개져 형체도 보이지 않을 어떤 한 방울로 남을 세월도 비슷하다. 우리를 채우고 울리는 한 그릇도 그렇다. 유명한 셰프도, 멋진 이름도 없는 이 된장찌개처럼 아무 것 없어 보이는 하루를 이룩하는 우리와 비슷한 것들이다.

정동현대중식당 애호가 정동현은 서울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한 끼’를 쓴다. 회사 앞 단골 식당, 야구장 치맥, 편의점에서 혼밥처럼, 먹는 것이 활력이 되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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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한끼서울] 양평동 된장찌개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정동현 생산일 2017-08-14
관리번호 D0000031074058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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