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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익선동 골목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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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담장을 그대로 살려 꾸민 익선동의 한 카페 ⓒ김종성

허물어진 담장을 그대로 살려 꾸민 익선동의 한 카페

‘한옥마을’ 하면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한옥집들을 떠올리게 되지만, 종로구 익선동 한옥마을은 조금 다르다.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에서 나와 맞은편 사잇길로 들어서면 네 개의 골목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진 후미진 동네가 나온다. 낡은 기와지붕을 한, 100여 채의 한옥들이 서로 감싸듯 다닥다닥하게 모여 있는 낯선 동네 익선동이다.

가까이에 종묘, 어르신들의 낙원이 된 낙원동,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관광지 인사동이 있지만 작년까지 익선동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약 100년 간 주민들과 함께 했던 좁다란 한옥 골목길에 저마다의 개성을 품은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이고 있다. 젊은 상인들이 찾아와 가게를 여니 적막했던 한옥 골목길이 한결 활기차게 변하고 있다. 동네 이름 익선동의 ‘익선(더할 益, 좋을 善)’은 고사성어 ‘다다익선’에 나오는 익선이다.

옛 한옥과 새 상가가 어울려 조금씩 변화하는 익선동 골목길 ⓒ김종성

옛 한옥과 새 상가가 어울려 조금씩 변화하는 익선동 골목길

1920년대에 지은 한옥마을에 부는 변화의 바람

익선동은 서울의 다른 오래된 동네와 같이 재개발될 예정이었으나, 주민들의 반대와 부동산 경기침체로 지지부진하다가 무산되었고, 그 와중에 주민들의 반이 떠나고 말았다. 북촌 한옥마을이 받는 지원제도도 없는데다, 빈집이 많아지면서 점점 도심 속 슬럼지역이 되어갔다.

그러나 2014년 말부터 한옥집을 개조해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가가 났고 다양한 카페와 공방, 음식점, 게스트하우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골목마다 자리한 상점들 모두 기존 한옥의 대들보, 서까래, 기와지붕을 살린 덕분에 독특하고 이채로운 외관의 가게들이 많아 걸음걸음이 즐거웠다. 오래되고 낡은 한옥거리와 조화롭게 어울리고자 하는 가게주인의 고민이 엿보였다. 심지어 허물어진 한옥의 담장을 그대로 살려 꾸민 카페가 있는가 하면, 마당이 있는 아담한 한옥집을 정감 있게 살린 익동다방, 연탄불을 피워 안주와 간식거리를 파는 재미있는 현대식 거북이슈퍼 등이 눈길을 끌었다.

연탄불에 쥐포, 오징어를 구워주는 거북이슈퍼 ⓒ김종성

연탄불에 쥐포, 오징어를 구워주는 거북이슈퍼

골목에 많은 상점이 들어서고 있지만 다행히 한옥골목의 모습은 크게 손상되진 않은 듯했다.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가게들 건너편에 철물점과 점집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하고 있어 재밌다. 그런 골목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건축가 조성룡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다. 조성룡 선생은 많은 시민들이 좋아하는 한강 선유도 공원을 설계했던 건축가로, “건축물에는 추억이 담겨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공간 안에 머무르며 발전할 수 있는 기억들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익선동은 한옥과 양옥의 건축양식이 섞인 근대식 한옥마을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 조성됐다. 북촌 일대의 한옥들도 이때 생겨났다. 당시 ‘건양사’라는 건설개발회사를 경영했던 정세권 선생이 도시 서민들을 위한 한옥마을로 개발한 것이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서민층이 살았던 곳답게 작고 소박한 한옥이 특징이다. 한옥 집들이 서로서로 지붕을 맞대고 서있는 일종의 개량한옥이다. 집 크기도 다른 한옥집의 절반인 50㎡(15평형) ~ 100㎡(30평형) 주택이 대부분이다. 상점으로 개조한 한옥 집안에 들어가 보면 ㄱ자형, ㄷ자형, ㅁ자형 등으로 형태가 다양하고 집마다 뜰 같은 아담한 마당을 갖추고 있다. 정세권 선생은 사업으로 번 돈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후원하고 참여한 애국자이기도 했다.

다채로운 상점들을 구경하며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한옥 집 지붕 위에서 고양이가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동네가 변하고 있지만 주인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는 듯 당당한 몸짓과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흥미로운 한옥골목 동네라고 소문이 나서 주말과 저녁에 외부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지만 익선동은 여전히 주민들의 공간이다.

마당이 있는 아담한 다방 ⓒ김종성

마당이 있는 아담한 다방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공존

익선동의 특징이자 매력 가운데 하나는, 세련된 상점들과 세탁소, 점집, 한복집들이 함께 이루는 ‘모던한 골목’ 풍경이다. 관광지와 여행지의 차이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인사동이나 삼청동처럼 동네주민은 보이지 않고 상점, 관광객만 가득한 동네는 핫 플레이스 혹은 유명 관광지일지는 몰라도 좋은 여행지는 아니다, 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한 할아버지가 리어카를 끌고 나와 골목길에 쌓여 있는 종이박스를 싣고 있었다. 이 도시 어느 곳에서나 익숙한 풍경이라 그런지 할아버지 뒷모습이 왠지 친숙했다. 동네에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불편한 점은 없냐고 물어보았다. 해가 저물면 동네가 어두컴컴하고 썰렁했었는데 요즘은 밤에도 골목길이 환해서 좋다신다.

할아버진 익선동에서 산지 40년이나 됐단다. 대도시 서울 한 동네에서 40년 넘게 산다면 서울도 고향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 익선동을 떠나지 않은 이유라도 있었는지 궁금했다. 바람 불면 춥고, 장마 땐 비도 새곤 하지만 햇볕이 드는 마당이 있어서 좋다고 하셨다. 어릴 적엔 연립주택, 커서는 아파트에서 살아온 기자에겐 안마당은 어떤 정서적 안정감을 줄까 궁금한 공간이다.

할아버지가 저녁밥 먹을 곳으로 알려준 밥집 ‘수련집’으로 향했다. 동네주민들이 단골인 20년이 훌쩍 넘은 백반집이다. 메뉴는 청국장, 동태찌개, 김치찌개 딱 세 가지로 할머니 두 분의 손맛과 인심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고봉밥에 김치와 콩나물무침 외에 젓갈, 깻잎장아찌, 고추무말랭이무침 등이 나오는데도 밥값은 3,500원이다. 익선동 제일의 아니 서울 최고의 ‘가성비’ 좋은 밥집이 아닐까 싶다. 슈퍼라는 이름이 무색한 구멍가게와 저렴한 술집, 고깃골목, 점심 땐 줄을 서서 먹는 칼국수 집 등도 남아 있다.

주민들 삶이 함께 녹아있는 익선동 풍경(좌), 할머니의 손맛과 인심이 푸짐했던 백반 한상ⓒ김종성

주민들 삶이 함께 녹아있는 익선동 풍경(좌), 할머니의 손맛과 인심이 푸짐했던 백반 한상

아쉬운 귀갓길, 골목 어귀를 걸어 나오는데 보기 편하게 만들어 놓은 동네지도 안내판에 소음·쓰레기·흡연을 삼가 해달라는 내용이 써있다. 익선동은 그저 도심 속의 ‘핫한’ 한옥거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주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주거지이기도 한 곳이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커피숍, 레스토랑, 와인 등 비슷비슷한 상업시설로 가득한 또 하나의 카페촌이 되지 않길 바란다. 재밌고 매력적인 도시는 변화의 바람 속에서도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공존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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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익선동 골목여행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시민기자 김종성 생산일 2016-12-15
관리번호 D0000028441298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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