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서울

영화 '춘몽'의 배경지, 수색동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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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암동 DMC와 수색동을 이어주는 지하통로 ⓒ김종성

상암동 DMC와 수색동을 이어주는 지하통로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인 <춘몽(春夢, 2016 장률 감독)>을 봤다. 다양한 성격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이 없는 독특한 영화로 기억된다. 서사에 빠져들지 않아서였을까,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동네가 시선을 끌었다.

영화의 배경은 은평구 수색동과 경의중앙선 수색역이다. 화면 속 수색은 영화 제목처럼 ‘봄날의 짧은 꿈’같은 동네였다. 시간이 멈춘 듯, 당장 내일 재개발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의 동네 너머로 높다란 마천루 빌딩들과 디지털미디어시티(DMC)가 보였다.

장률 감독은 ‘수색’이라는 동네를 일컬어, 어제 갔다 와서 오늘 생각하면 그 컬러가 잘 생각나지 않은 곳이라 했단다. 내겐 어떤 컬러로 비쳐질까 궁금했고, 머지않아 재개발로 사라질 동네풍경을 기록하고픈 마음을 안고 6호선 전철 DMC역에 내렸다.

영화에 나온 것처럼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와 수색동을 오가는 지름길이자 이채로운 지하통로가 있다. 영화는 철길과 지하터널로 나뉜 수색동과 상암동 DMC의 절묘한 대조를 통해 재개발 지역 원주민들의 애환과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다. 동네와 동네 사이에 이어진 지하통로는 서울에선 보기 드물어서 그런지 걸어 지나가면서도 무척 비현실적이고 꿈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지하통로를 지나가면 전혀 다른 풍경의 동네가 갑자기 나타나니 말이다.

이 지하통로는 1936년에 설치된 길이 188m, 폭 2.9m, 높이 2.1m의 오래된 지하보도다. 경의선 철도로 인해 단절된 마포구 상암동과 은평구 수색동 지역을 연결하는 통로다. 꽤 긴 지하터널은 사람이나 자전거가 지나가게 돼있고, 벽화처럼 그려져 있는 그림 가운데 1908년 지어진 옛 경의선 수색역이 눈길을 끌었다.

<춘몽>이 내가 알고 익숙했던 영화의 규칙을 깨버렸듯, 수색동이란 동네는 도시 서울을 규정했던 것들을 깨버렸다. 이를 테면 “서울, 무엇도 영원한 것 없이 쓰러져 가는 것들로 가득 한 좌충우돌의 도시 ?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 같은 것 말이다.

옛 수색역 옆에 있었던 역전 이발관이 아직도 남아있다 ⓒ김종성

옛 수색역 옆에 있었던 역전 이발소가 아직도 남아있다

놀랍게도 옛 경의선 수색역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던 ‘역전 이발소’가 기차역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어디 멀리 소읍 여행을 떠나온 것 같은 기분에 이발소 간판 사진을 찍는데, 어머니뻘의 가게 안주인 아주머니가 날도 추운데 커피 한 잔하고 가라고 권했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40년이 넘었다는 이발소 안은 의자며, 이발 기구, 돈을 보관하는 소리 나는 금고 등 옛 모습 그대로였다. 리모델링을 새로 하려다 그냥 두었단다. 난로에 올려놓은 주전자로 끓인 물로 타주신 믹스커피가 유난히 달달했다. 조금 후 나타난 이발사 아저씨가 동네 얘기, 수색역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 지역에서 오래 산 노인은 그 동네의 작은 도서관이더니 맞는 말이었다.

이 동네는 옛날 ‘무르치(물빛골)’이라는 마을이었단다. 한강 하류지역의 이 마을은 장마철만 되면 물이 차올라 마을과 벌판이 온통 물 일색으로 변해버린다고 하여 ‘무르치’가 되었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수색(水色)’이 됐다고.

수색역에 있는 기차들의 쉼터, 서울차량사업소 ⓒ김종성

수색역에 있는 기차들의 쉼터, 서울차량사업소

지금은 멀끔한 현대식 전철역으로 바뀐 수색역은 1908년 서울과 의주를 오가는 경의선의 기차역 가운데 하나였다. 수색역엔 여느 기차역과 다른 곳이 하나 있다. 무궁화호에서 관광열차 등 갖가지 열차들이 와서 쉬면서 수리나 정비를 받는 차량기지가 있다. 공식명칭은 서울차량사업소다. 덕분에 도시 서울에서 보기 드문 풍경을 자아내어 기차여행을 좋아하고 사진 찍기를 즐기는 기차 마니아 혹은 ‘철덕(철도 덕후)’들이 찾아온다.

화덕의 열기에 후끈후끈한 형제대장간 ⓒ김종성

화덕의 열기에 후끈후끈한 형제대장간

수색역 옆에 있는 ‘형제 대장간(은평구 수색로 249)’도 빼놓을 수 없는 수색동의 명물이다. 요즘 같이 추운 초겨울 날씨에도 이곳은 후끈후끈하다. 간판처럼 두 대장장이 형제가 의좋게 화덕 앞에서 무쇠를 달구고 망치질하고 있는 형제 대장간. 형님 대장장이는 13살 때부터 대장간 일을 했단다. 1960년대 대장간이 자리한 이 대로변은 별별 대장간들이 많이 늘어선 일종의 대장간 거리였단다.

서울미래유산이 된 형제대장간 ⓒ김종성

서울미래유산이 된 형제대장간

이제 하나 남은 형제 대장간은 그 끈기와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이 됐다. 게다가 형님(류상준氏) 대장장이 아저씨는 문화재청이 충남 부여에 설립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문화재수리기능자 양성과정 강의를 하는 객원교수로 나가고 있단다. 50여 년 간 대장장이 일에 정진한 세월에 대한 인정과 보상을 받는 것 같아 흐뭇했다. 그런데 뜨거운 화덕 앞에서 웬 20대 청년이 땀을 흘리며 쇠를 열심히 달구고 있었다. 조수로 일하며 대장장이 일을 배우고 있단다. 대장간에 한결 활력과 생기가 돌았다. 말과 행동이 꾸밈이 없고 조금은 거칠었던 ‘춘몽’의 인물들처럼 수색동은 희노애락이 있는 인간미가 배어나오는 동네지 싶었다.

서울둘레길 7코스에 나오는 봉산 초입길 ⓒ김종성

서울둘레길 7코스에 나오는 봉산 초입길

수색동엔 서울둘레길 7코스(봉산~앵봉산길)에 나오는 봉산의 초입길이 수색청구아파트 뒤로 나있다. 봉산의 길고 부드러운 능선 길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까지 이어진다. 편안한 봉산길을 걷다 문득 뒤돌아보니 어느새 수색동이 저 뒤로 보였다. ‘춘몽’에 나오는 인물들이 불렀던 노래, 산울림의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가 떠올랐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 지진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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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춘몽'의 배경지, 수색동에 반하다 - 문서정보 : 원본시스템, 제공부서, 작성자(책임자), 생산일, 관리번호, 분류
원본시스템 내손안에서울 제공부서 뉴미디어담당관
작성자(책임자) 시민기자 김종성 생산일 2016-12-02
관리번호 D0000028249249 분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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